한 시대의 다른 삶 - 항일과 친일

  • 입력 2007.12.17 10:17
  • 기자명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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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자의 비극과 영웅주의자의 타락

조명희(1894-1938): 충북 진천에서 몰락한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1920년 동경 유학시절 극예술연구회에 참가했으며, 1921년 동우회 순회극단의 일원으로 연극운동을 전개했다.

1925년 카프(KAPF: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에 가입했고 식민지 조선민중들의 고단한 삶과 애환을 그린 땅속으로, R군에게, 저기압, 농촌사람들, 동지 등 다수 작품을 발표했다. 단편소설집으로 낙동강이 있다.

1928년 일제의 탄압을 피해 소련으로 망명했다. 한인촌 교사로 일하면서 연해주 한인신문과 잡지 등에 시와 기고문을 발표했다.

1934년 소련작가동맹의 원동지부 간부로 일하는 한편, 만주의 항일무장투쟁을 다룬 대하소설 만주 빨치산을 집필했다. 그러나 집필 중이던 1938년 스탈린의 한인강제이주가 실시되는 와중에 간첩이라는 누명을 쓰고 총살당했다. 뒤에 복권됐고 러시아 한인문학의 아버지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김동인(1900-1951): 창씨명은 하가시 후미히토. 1919년 도쿄에서 최초의 문학동인지 창조를 발간했고 귀국 후 배따라기, 감자, 광염 소나타 등 단편소설과 운현궁의 봄, 젊은 그들과 같은 역사소설을 집필했다.

1939년 성전종군작가의 일원으로 중국을 돌며 일본군을 위문했다. 이후 친일단체인 조선문인협회, 조선문인보국회 등에 가입하여 간부로 활동했다.

그의 친일 소설로는 백마강, 매일신보1941과 성암의 길, 조광1944가 있다. 백마강은“내선일체의 성지 백제를 배경으로 신체제에 적응하여 역사소설의 신기원을 만들고자”쓴 소설이다. 성암의 길은 도쿠가와 막부 시절의 시인이자 양이근왕론자(攘夷勤王論者)였던 하리가와 센간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천황이데올로기를 선전하려는 작품이었다.

이 외에도 총동원태세로, 반도민중의 황민화, 일장기 물결 등 친일수필을 다수 발표하여 문필보국에 앞장선 대표적 친일문이었다.


광야의 지사와 해바라기 시인

이육사(1904-1944): 본명은 이원록이며 육사는 그의 호다. 1925년 중국으로 건너가 의열단에 가입하였고 장진홍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관련돼 3년간 옥고를 치렀다. 그 때의 수인번호 64를 따서 호를 ‘육사’라 지었다. 출옥 후 중국 북경대학을 다니면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1933년 귀국하여 황혼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왔고 1937년 윤곤강, 김광균 등과 함께 동인지 자오선을 발간했다. 청포도, 절정, 광야 등 우리 민족의 웅혼한 기상과 독립정신을 고취하는 시들을 발표했다.

1943년 6월 국내에서 지하항일운동을 벌이던 중 일제경찰에 체포되어 이듬해 북경감옥에서 옥사했다.

서정주(1915-2000): 창씨명은 다츠시로 시즈오. 1936년 등단 직후 시인부락을 창간하고 주필을 맡았으며 1941년 화사집을 출간했다.

1942년 평론 시의 이야기-주로 국민시가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다수의 친일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친일문학지 국민문학과 국민시가를 편집했다. 항공일에와 오장 마쓰이 송가는 전쟁터에 나가 일본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선동하는 대표적인 친일시다.

이 외에도 징병 적령기의 아들을 둔 어머니에게, 스무살된 벗에게, 헌시-반도학도 특별지원병 제군에게 등의 친일시와 소설 최체부의 군속지원 등 수많은 친일작품을 남겼다.

해방 후에는 한국문인협회 이사장 등 온갖 감투를 썼으며 대한민국예술원상, 5.16문학상, 자유문학상, 금관문화훈장 등 셀 수 없이 많은 상을 받는 등 양지에서만 온갖 영화를 누린 자칭 종천순일파(從天順日派)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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