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를 빛내는 문화재를 찾아서

  • 입력 2008.05.31 22:59
  • 기자명 마스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국최대의 읍성 규모 자랑
사적 제 337호 나주읍성(羅州邑城)

나주읍성의 축조연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나주는 마한 45개국 가운데 하나인 「불미지국(不彌支國)」으로 비정되고 있으며 고려시대(성종2년, 983년) 목(牧)으로 승격한 이래 전주와 함께 전라도의 주요 지방 도시였던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고려시대 이전 또는 고려시대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려 태조신성대왕 원년 하 6월 병진년이나, 현종 원년(1010) 거란의 침입시 현종이 남순하여 10여 일간 머물다가 환도한 사실 등은 지방행정 중심도시로서 나주의 비중과 함께 이 시기부터 나주읍성의 존재 가능성을 추론해 볼 수 있는 자료들이라 할 수 있다.

나주읍성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군사적 목적과 행정적 기능을 지닌 읍성인보체제(邑城人保體制)로 전환하게 되면서 읍성축조론이 대두된다.

이때 나주성은 이미 태종 4년(1404) 10월에 완성되어 읍성축조 대상에서 제외되나 문종때에 이르러 축성이 법대로 쌓아지지 않고 성내에 민호가 많음에 따라 성터를 7,000척으로 정하여 개축을 시도하였으나 흉년 등이 겹쳐 세조3년(1457)에도 완성하지 못하였다.
그 후 나주목사 김계희(1457년 8월부터 1459년 11월 재임)에 의해 현재의 성터 규모로 완성됐다.

나주읍성은 대부분의 조선시대 읍성과 마찬가지로 평지와 구릉을 이용하여 축조한 평산성으로 배후에는 금성산성을 두고 있다.

전체 성벽의 크기를 복원하면 약 9,700m이나 현재는 대부분이 훼철되어 부분적으로 남아 있으며 성곽의 형태는 타원형이다.

읍성의 성문은 4개로 동문(東漸門 ), 서문(西城門), 남문(南顧門), 북문(北望門)으로 남고문은 지난 93년, 동점문은 2006년 35억의 사업비로 정면 3칸, 측면 2칸, 2층 누문(樓門)형식의 성문을 복원하였으며, 서성문은 현재 25억의 사업비로 옹성을 비롯한 성벽과 문루를 오는 2010년까지 복원할 계획이다.

사적 제456호, 나주오량동토기요지(土器요窯地)

2004년 10월에 사적으로 지정된 나주오량동토기유적은 지난 2001년 오량동 일대에서 분묘조성을 위한 개발사업 중 유적이 노출된 것이 발견되어 긴급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되었다.

오량동 유적은 영산강의 남안 구릉지역으로 복암리고분군과 반남고분군사이에 있는데 영산강 본류와 인접하여 강을 통한 교통의 요지에 해당되는 곳이기도 하다.

2001년과 2002년 2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결과 노출된 17기의 가마 중 총 5기의 가마를 조사하였는데, 주로 옹관을 조성하던 가마로 추정되고 있다.

가마에서는 다량의 옹관편을 비롯하여 개배류, 기타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고 가마부근에서는 석각묘(돌덧널무덤) 2기가 조사됐다.

유적의 연대는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였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발굴조사 결과 대량의 가마유적이 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는 점이 확인됐다.

나주오량동토기유적은 삼국시대의 옹관고분의 전용 대형옹관을 굽던 가마유적으로 전용옹관의 제작과정과 제작집단(세력), 운송과 교류 등의 비교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가치가 있고, 주변의 반남고분군, 복암리고분군 등의 유적과 상관성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이제까지 영산강유역 고분에 사용된 전용옹관의 제작과정이 밝혀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발견된 유적이어서 향후 고대사회의 문화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자료제공: 나주시, 문화재청)

/정리 이영창 기자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