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를 빛내는 문화재를 찾아서

▶ 풍류를 즐기며 선비정신을 세우다

  • 입력 2008.07.21 22:27
  • 기자명 마스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도유형문화재 제184호
벽류정(碧 流亭)

세지면 벽산리에 자리 잡은 벽류정은 벽류정 김운해가 건립한 정자로 인조 18년(1640)에 세웠다. 원래는 조주(趙注)가 지은 별장이 있던 자리였으나 광산 김씨의 소유가 되면서 그 터에 건물을 지었다. 여러 차례 보수공사를 거쳐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이곳에는 글씨에 능한 민규호(좌의정)와 신헌(어영대장)의 현판과 김수항의 정기 등 11개의 현액(懸額)도 함께 보전되어 있다. 금성산을 뒤로하고 펼쳐진 평야 속에 자리한 3개의 언덕 가운데 가장 큰 언덕의 숲속에 자리하고 있으며 앞면 3칸, 옆면 3칸 규모의 지붕이 여덟팔자(八)모양인 팔작지붕의 목조유실형 정자이다.

이 정자의 결구 중 가장 큰 특징은 4고주에 웃인방을 횡가(橫架)하여 매입(買入)맞춤을 하지 않고 중심을 비껴 엇덕거리 이음으로 간결법을 쓴 것이 독특하다.

중재실의 4명의 결분합문을 두었고 바닥은 우물마루로 되어 있으나 후면의 툇마루가 1단 높게 설치된 것으로 보아 본래 온돌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붕은 팔작기와지붕이며 처마의 평고대는 30여척 길이의 통재를 사용하여 처마의 흐름을 유려하게 의장한 벽류정은 전체적으로 균형이 잡힌 아름다운 정자이다. 

 
제217호 미천서원기언목판
(眉泉書院記言木板)

미천서원기언목판은 조선 숙종 때의 문신이자 학자인 미수 허목(許穆,1595∼1682)의 시문집 93권 25책을 새긴 목판이다. 숙종 15년(1689)에 판을 새겼으며 총 861매에 이른다.

기언을 남긴 미수 허목 선생은 호남의 문장가인 백호 임제(林悌)의 외손이다. 문집명을 기언(記言)이라고 한 것은 언행이 군자의 관건이며 영욕의 갈림길이므로 이것이 두려워 날마다 반성하기 위해 말로 기록한 때문이라 하였다.

문집내용 가운데 심학도와 요순우전수심법도는 심학의 대요를 밝혔고, 논정폐소를 지어둔천제, 호포제, 과거제 등의 폐단을 개혁할 시정책을 제시했다.

특히, 예설에 관한 내용으로‘대왕대비복제수의'에서 효종의 승하에 따른 복제문제에 대해 삼년설을 주장하여 송시열의 일년설과 논쟁하였다.

이밖에도 논이기와 심지지각의 글에서 이기와 형상에 관한 철리적 접근을 시도하였다.
또한 문학과 고문에 대한 해박한 언급이 보이고 있으며 동사와 흑지열전에서 그이 역사의식을 엿볼 수 있다.

허목은 23세 때 정구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퇴계의 학문을 존중하였다. 이로 인해 스승 정구로부터 퇴계의 학문을 이어 받아 다시 그 학문이 이익에 의해 계승, 발전되는 구실을 하였다.
예학에 밝았던 허목의 행적을 알 수 있으며 오래된 연대의 것으로 보존상태가 매우 좋고 누락된 목판이 없어 그 가치가 높다. 현재는 안창동에 소재한 미천서원에 소장되어 있다. 

미천서원은 17세기 조선의 거유(巨儒)인 미수 허목의 도학정신을 추모하기 위하여 숙종 16년(1690)에 호남유림의 연명상소로 영산강 미천(眉泉)위에 사우가 건립되었고 1693년 사액되었다.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룬다가 1893년 일부가 복원된 후 1937년 허영규가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다. 

제286호, 금성정의록(錦城正義錄) 

금성정의록(錦城正義錄)은 나주의 유림이던 겸산 이병수(1855~1941)가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관군편에서 적은 기록과 1895년 을미년의 의병 등에 관한 기록을 필사한 것으로 나주 지역 동학과 의병운동을 이해하는 사료적 가치가 크다.

목활자본으로《겸산유고(謙山遺稿)》제19 ·20권에 수록된 것으로 1894년 동학농민운동 이래 3년간의 사적을 갑 ·을 ·병 편으로 구성하였다. 갑편은 갑오년(1894), 을편은 을미년(1895), 병편은 병신년(1896)에 각각 해당한다.

저자인 이병수는 동학농민군의 궐기를 맞이하여 나주의 수성(守城)을 위해 당시 나주목사 민종렬에게 도약소(都約所) 직월(直月)의 직임을 가지고 적극 협조하였다. 그 후 기우만(奇宇萬)이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을 계기로 창의하였을 때에도 교임(校任)으로서 이에 호응하여 나주 지방의 유생창의에서 활약하였다. 1918년 함평으로 이거하여 후진을 양성하다가 다시 31년에 나주로 돌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