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를 빛내는 문화재를 찾아서

▶ 무인의 기개와 고대 산성

  • 입력 2008.07.27 18:34
  • 기자명 마스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도기념물  제53호  최희량장군신도비(崔希亮將軍神道碑)
 
신도비란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가까이에 세워두는 것을 가리킨다. 조선 중기의 무신인 최희량 장군을 기리는 신도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 몸을 세우고 그 위에 지붕돌을 올렸다. 광무 5년(1901) 장군의 후손들이 비를 세웠으며 비문은 송치규가 글을 짓고 송지헌이 글을 덧붙여 기록하였다. 

최희량의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경명(景明), 호는 일옹(逸翁), 시호는 무숙(武肅)이다. 신도비가 있는 다시면 가흥리에서 태어났다. 1594년(선조 27)에 무과에 급제, 선전관이 되었다. 1597년 임진왜란 때 흥양현감으로 이순신장군과 큰 공을 세웠다. 왜군의 포로가 된 신덕희(申德希) 등 700여 명을 생환시키기도 하였다.

이순신장군이 전사한 뒤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604년에 선무원종(宣武原從) 1등공신의 훈작이 내려졌다. 1774년(영조 50)에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에 추증됐으며 효종 2년(1651)에 생애를 마쳤다.

최희량이 전쟁의 성과를 적어 보낸 문서와 회답으로 받은 문서를 한데 모은《임란첩보서목(任亂捷報書目)》은 1979년에 보물 제660호로 지정되었다. 1984년 사우인 무숙사가 건립되었다.

제57호 나주 무열사(羅州武烈祠)
 
조선 정조 21년(1797)에 무열공 배현경, 금헌 배정지, 정절공 배극렴을 모신 사당으로 무열사라 사액하였으며 나주 유림이 발의하고 전국 각 향교의 협찬으로 건립된 사당이다.

배현경은 고려태조 때 무신으로 경주 사람이다. 궁예 때부터 활약했던 인물이며 고려건국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일등공신에 오르고 후삼국 통일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시호는 무열이다.
배정지는 고려시대 무신으로 10세 때 금위에 들어가 도지가 되었다. 그는 원나라에 들어가 원제로부터 용사라는 칭찬을 받고 백금을 하사 받기도 하였다.

배극렴은 고려 말 왜구토벌에 공을 세운 조선의 개국공신이다. 고려 우왕 2년(1376) 진주에 침략한 왜구와 1378년 욕지도에서 왜구를 대파하였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문에 영당(影堂)만을 남기고 모두 철거되었다. 그 뒤 영당은 다시 고쳐졌으며 1938년에 강당이 복원되었다. 영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 맞배지붕이다. 강당은 정면 5칸, 측면 1칸인 팔작지붕으로 전퇴와 마루가 있다. 이밖에도 외삼문과 내삼문이 있다.
 
제87호 회진성(羅州會津城)
 
다시면 회진리에서 영산강으로 흘러드는 작은 계곡과 계곡을 감싸며 쌓은 삼국시대의 산성이다.

성벽은 둘레가 2.4㎞로 전남 지역뿐만 아니라 삼국시대 토성 가운데서도 큰 규모에 해당한다. 계곡 주변의 3면을 둘러싸고 있는 산지는 급경사의 절벽을 깎아내어 성벽을 만들었고 계곡에는 폭 6m, 높이 6m로 흙을 한 층 한 층 다져 성벽을 만들었다.

능선의 평탄한 곳을 이용하여 4개의 문을 만들었던 자리를 확인할 수 있고 남쪽의 낮은 계곡에는 수문(水門)이 있었다.

회진 마을은 원래 백제의 두힐현이었다. 신라 때 회진으로 바뀌어 나주목에 속했다가 조선초 폐현되어 없어졌다. 백제 때 축조되어 조선 초기까지 계속 이 지역 정치·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유서 깊은 곳이다. 회진성은 가까이 있는 나주 복암리 고분군을 만들었던 이 지역 토착세력의 생활공간 유적으로 추정되며 영산강 유역 고대 세력인 마한의 역사 연구에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백제의 축성기법을 알아볼 수 있고 그 뒤의 수축 양상도 남아 있어 우리나라 성곽 연구에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자료제공: 문화재청)

/정리 이영창 기자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