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하 나주지역 항일투쟁

  • 입력 2008.11.03 14:58
  • 기자명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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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인간이 생활하면서 남긴 삶의 발자취이다. 그것이 아무리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일반인과 별반 차이없이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고민하고 활동했던 영역을 후세들이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근현대사는 질곡의 역사요 진실이 감추어진 부분이 너무 많고 위정자에 의해 왜곡된 사실이 많았다.
 
현재 소장파 역사학자들이나 정치평론가들이 왜곡을 밝혀내고 사실적인 내용으로 진실을 찾아가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지역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기록되지 않는 근·현대사 부분을 발굴해 나주지역의 역사를 바로잡는데 이번 기획취재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특히 일제시대인 1930년 이르러 시작된 적색농민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그리고 해방이후 미군정에 반발해 일어났던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 인민위원회, 보도연맹사건 등을 발굴 새롭게 정리돼져야 한다. 특히 나주지역은 봉황양민학살사건, 온수동 양민학살사건 등 유독 사상으로 인한 학살이 이루어졌다.

이에 대한 진상규명도 아울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나주신문은 이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해 2001년부터 유족회와 함께 활동을 벌여 정부로부터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진상위까지 구성해내 질곡의 역사를 바로 잡는 지역언론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고자 노력했다.
 
이제 이번 기획취재보도를 통해 나주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지역민 스스로 나주인의 자긍심을 갖는 계기로 삼고자하는 것이 이번 기획취재의 또 하나의 목적이다.

                                                       -편집자 주-


반외세의 자주독립과 반봉건을 지향하면서 일제의 침략을 끝까지 막아내고자 했던 궁삼면토지회수투쟁과 나주가 진원지인 광주학생독립운동은 나주인들의 충절과 정의감이 표출된 대표적 사건이다.
 
궁삼면토지회수투쟁과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우발적인 충돌이나 일시적인 감정싸움에서 발단된 것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정치적 경제적 침략에 대한 분노가 표출된 민족항쟁이다.
일본의 정치적 침략은 동학농민혁명을 무력으로 좌절시키고 한말의병항쟁에서도 남한대토벌작전까지 벌이면서 호남지방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했다. 곡창지대인 호남의 수탈은 일제의 근간을 지탱하는 버팀목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독립운동도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그 가운데서도 농산물과 농토가 풍부한 나주는 봉건세력이 욕심내는 수탈대상이었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면서부터 약탈이 집중된 곳이었다. 일찍부터 일본인의 이주가 시작되었고 동양척식회사가 진출하여 착취를 시작했다. 영산포에 진출한 일본인들은 닥치는 대로 토지를 사들여 지주로 변신하였고 소작료 수탈과 고리대를 이용해 토지소유를 확대했다. 나주의 농민들은 동양척식회사를 중심으로 한 일본인의 수탈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1920년대엔 소작쟁의 투쟁으로 이어졌다. 그 대표적인 것이 궁삼면토지회수투쟁이다.
 
나주지역에서 농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지주와 소작관계 때문이다. 농토를 수탈당한 농민들의 분노가 일제와 직접 수탈자인 일본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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