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지역 농민과 학생의 항일운동

  • 입력 2008.11.17 18:30
  • 기자명 마스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주농민의 자긍심 궁삼면토지회수투쟁

'이 논은 내 땅인데 어떤 놈이 지 땅이라고 푯말을 박냐!'
 
일본 헌병과 동양척식회사 직원에 맞서 당당하게 맞서 싸우다가 다치거나 투옥되고 심지어는 무참히 목숨까지 빼앗겼다.
 
암흑의 시절인 일제강점기에 농민들의 피땀 어린 투쟁이 나주에 있다.
 
궁삼면(宮三面이)토지회수투쟁이다. 궁삼면은 행정 명칭이 아니다. 일제하 농민들이 되찾고자 했던 나주군 지죽면, 욱곡면, 상곡면 3개 면의 궁토(宮土)를 말한다. 지금의 영산포, 왕곡면, 세지면, 봉황면 일원이다. 궁토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은 영친왕의 생모인 순빈 엄씨를 위해 지은 경선궁의 장토로 둔갑되었기 때문에 궁토라 부르는 것이다.
 
1888년 두 해에 걸친 혹심한 가뭄으로 영산강 유역인 지죽, 욱곡, 상곡 등 3개면 일대의 민유지 4만5천여 두락(마지기, 한 말의 씨를 뿌리는 데 적합한 토지의 면적을 말한다.)을 경작하던 1천4백여 농민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마을을 떠나게 되어 주인 없는 전답이 1천1백여 두락에 이르렀다.

경저리(지방관청의 편의를 돕는 일종의 대행기관 또는 연락기관인 경저에서 일을 보던 사람을 일컫는 말로써 당시의 경저인은 한 고을이나 여러 고을의 사무를 서울에서 대행하였다.) 전성창은 자신이 3년 동안 세금을 대납했다 속여 이 땅을 자기 소유로 가로챘다. 그 밖의 소유자가 있는 토지 1만3천여 두락까지 강탈하였다.
 
1894년 되찾은 이 땅은 2년 후 채규상이 전라도관찰사로 나주에 부임하면서 다시 강탈당했다. 1897년엔 토지환부판결을 받게 된다. 이에 탐욕스럽고 무자비했던 전성창은 김영규와 모의하고 순검관, 헌병 등 1백여 명을 앞세워 반대하는 농민을 협박하고 구타하면서 4만5천 두락의 농토를 다시 약탈하였다.
 
1899년엔 경성재판소에 제소하기 위해 경성에 올라간 농민 36명은 체포되어 투옥당했다. 승소판결 토지증거서류를 빼앗겼다. 1908년 토지소유증명을 해주라는 내각법제국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김영규는 김성기 나주군수에게 벼 200섬을 뇌물로 바쳐 삼면의 토지를 경선궁의 장토라고 허위보고하고 정부의 결정을 번복하게 만들었다.
 
1909년 동양척식회사는 토지매수반을 파견하여 관헌의 위력과 뇌물로 분쟁중인 삼면토지의 매매계약을 체결했다. 당시 시가 200만원 상당의 토지를 단돈 8만원에 매수하고 3개 면민에게 승인날인을 강요했다. 한 사람도 이에 응하지 않자 3개 면의 이상협, 장홍술, 강자옥, 김운서 등을 체포하여 혹독한 태형 끝에 도장을 빼앗아 삼면 토지를 동양척식 회사소유로 만들어 버렸다.
 
이때부터 3개 면민과 동양척식회사와의 기나긴 토지투쟁이 시작된다. 한민족 치욕인 한일합병(1910년)을 당한 해의 10월엔 면민 대표들이 상경하여 동양척식회사와 담판을 벌였으나 무위에 그쳤다. 이에 면민들은 토지매수무효 및 토지반환청구 소송을 냈다.
 
동양척식회사는 1912년 일본 이민자들에게 경작권을 양여하기 위해 일본인 헌병들을 앞세워 왕곡면 양산리에 출동하여 논두렁에 닥치는 대로 동척의 푯말을 박았다. 이 때 이회춘의 노모가 강렬하게 저항하자 새끼줄로 노파의 목을 묶고 군도와 몽둥이로 난타하여 사망하였다.
 
이에 이회춘은 경성고등법원에 호소하려고 마을사람들과 노모의 시체를 안고 서울을 향했다. 남평에 이르자 헌병들은 이회춘을 몽둥이로 모질게 패고 쫓아 버렸다.
 
1913년 경성고법에서 토지반환청구소송에는 승소하였으나 돌아오던 중 나주경찰서 경찰대에 혹심한 구타를 당하고 승소판결문을 빼앗기고 말았다. 거듭된 패소에도 소유권을 주장하던 동양척식회사는 1914년 등기말소 소유권인도소송을 제기한 3개 면을 헌병 7백여 명을 동원하여 점령하고 면민대표 10명을 구속하고 농민 150여 명을 영산강 헌병분유소와 광주감옥에 가두었다. 또 2만여 면민에게는 3개월 동안 문 밖 출입을 금지시키고 가혹한 고문과 협박으로 소유권포기증서에 날인하게 만들었다. 결국 협박과 고문을 못 이겨 농민들은 소송도 취하하고 말았다.
 
1920년 면민대표 120여 명은 소작료 불납운동을 전개하고 토지회수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남자는 몽둥이를 들고 여자는 치마에 돌멩이를 담아 나주경찰서를 습격하고 3개 면 주재소와 소작료 수납장 기물 등을 모조리 파괴하고 소각시켰다.
 
이 사건으로 면민대표 등 2백여 명이 체포구금 되었다. 이를 탄원하기 위해 일본인변호사 후세 다츠지(布施辰治 포시진치, 한국의 독립운동과 한국인의 인권을 위해 투쟁한 일본의 인권변호사. 1919년 2·8독립선언으로 인해 체포된 조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