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항일학생운동 인물사

2차 나주학생독립운동 주도한
이창신(李昌信)

  • 입력 2009.09.28 09:13
  • 기자명 나주학생운동독립기념관 전시기획팀장 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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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은 나주에서 시작된 학생독립운동이 80주년을 맞는 해이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학생독립운동은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여기'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현재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나주출신 항일학생독립운동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흔히 학생독립운동 사건에 대해서는 대강이나마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학생독립운동을 주도한 인물들에 대해서는 몇몇 인물들을 제외하고 잘 알려지지 않았다. 나주신문의 제안으로 나주항일학생운동 인물사를 연재하고자 한다.

나주출신 항일학생독립운동가에 대한 연구는 아직 미진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물에 대해 다루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필자의 잘못된 글로 자칫 그분들의 업적에 누(累)가 될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때문에 필자의 개인적 의견은 가급적 배제하고 기존 연구자료 등을 토대로 인물사를 정리하고자 한다.



이창신(1914~1948)선생은 나주농업보습학교에 재학 중이던 1929년 11월 27일 나주학생시위에 참여했다.

그는 같은 학교 학생인 이채후, 김성남 등과 함께 농업보습학교 학생들에게 시위운동에 함께할 것을 권유하면서 독려하자 이에 50여명이 동참했다.

또한 이창신은 박공근, 유찬옥 등과 함께 일제의 식민지 탄압에 항거하는 격문 2천여매를 비밀리에 인쇄하였다.

11월 27일 농업보습학교 학생 및 나주보통학교 5∼6학년 200여명의 학생들은 정오에 각 학교 휴게시간이 되자마자 교문을 나와 시위운동에 들어갔다.

이때 이창신은 대열 선두에서 학생시위를 이끌었다.

그런데 나주학생들의 저항은 11월 27일의 봉기로 끝나지 않았다.

이틀 뒤인 11월 29일에는 영산포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맹휴가 일어났다.

또 유찬옥, 홍민후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이창신을 비롯한 나주학생들은 1930년 2월 10일 정오 제2차로 시위를 벌였다.

이날 시위 모습을 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 하였다.

'십일(장날) 오전 12시경에 나주실업학교와 나주공립보통학교 생도 2백여명이 광주학생동정만세! 조선학생만세! 등을 연호하여 시위운동을 하다가 경관에게 포위되어 속속 피검 중이라더라.'

이창신은 이 사건으로 50여 명의 학생들과 같이 검거 되었으며 일본경찰에 의해 '엄중한 취조'를 받고 2월 17일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창신을 비롯해 적극 가담한 학생들은 학교 측으로부터 징계를 받았다.

조선일보는 나주농업보습학교의 시위 참가학생 처벌을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2월 19일 나주농업보습학교 교장이 동교 이학년생 이창신, 최봉춘, 박춘근 세 명에게 무기정학 처분을 한 후 아직 해제하기도 전에 27일에는 또 2학년생 11명, 1학년생 4명에게 2월 28일부터 3월 2일까지 3일간 근신명령을 하였다' 한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이창신은 11월 27일나주학생봉기에 이어 박공근, 유찬옥 등이 구속되고 없는 상황에서 1930년 2월 10일 2차 나주학생봉기를 주도하였다.



■ 참고자료

박찬승「11ㆍ3 학생독립운동과 나주」

「광주학생독립운동과 나주」(나주시, 1999). 나주학생들 전부를 석방 여러차례로 나누어,

중외일보1930년 2월 22일자.

나주실업교생 십오명에 근신명령 무기정학을 풀기전에 처분 학부형은 대분개,

조선일보1930년 3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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