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로가기 URL 다른 공유 찾기 기사스크랩하기 가 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페이스북(으)로 기사보내기 트위터(으)로 기사보내기 URL복사(으)로 기사보내기 닫기 한자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고 기업체 등에서 입사시험에 한자를 추가하는 경우도 늘었으며, 유치원 어린이까지도 한자 급수 시험에 응시하는 것이 필수가 됐다.또 수능시험에도 고사성어와 관련된 문제가 매년 꾸준히 출제되고 있다.고사성어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는 지혜의 보고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 마음의 핵심을 짚어주는 혜안이 번뜩이는 글들은 그대로 인생의 지침으로 삼을 만하다.이에 나주신문은 알기 쉬운 고사성어의 풀이와 표현의 유래가 된 고사를 매주 간단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邯 고을이름 한, 鄲 조나라 서울 단, 之 어조사 지, 夢 꿈 몽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말로 인생의 부귀영화는 일장춘몽과 같이 허무함을 뜻함.[유래]당나라 현종(玄宗)때의 이야기다.도사 여옹(呂翁)이 한단(邯鄲:조나라의 수도)의 한 주막에서 쉬고 있는데 행색이 초라한 젊은이가 옆에 와 앉더니 산동(山東)에 사는 노생(盧生)이라며 신세한탄을 하고는 졸기 시작했다.여옹이 보따리 속에서 양쪽이 구멍이 뚫린 도자기 베개를 꺼내주자 노생은 그것을 베고 잠이 들었다.노생이 꿈속에서 점점 커지는 그 베개의 구멍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있었다. 노생은 최씨(崔氏)로서 명문인 그 집 딸과 결혼하고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아가 순조롭게 승진했다.경조윤(京兆尹)을 거쳐 어사대부(御史大夫) 겸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올랐으나 재상이 질투하는 바람에 단주자사(端州刺史)로 좌천되었다. 3년 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조정에 복귀한 지 얼마 안 되어 마침내 재상이 되었다.그후 10년 동안 노생은 황제를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한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어느 날 갑자기 역적으로 몰렸다. 변방의 장군과 결탁하여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다.노생과 함께 잡힌 사람들은 모두 처형당했으나 그는 환관(宦官)이 힘써준 덕분에 사형을 면하고 변방으로 유배되었다.수년 후 누명에 의한 조임이 밝혀지자 황제는 노생을 소환하여 중서령(中書令)으로 제수한 뒤 연국공(燕國公)에 책봉하고 많은 은총을 내렸다.그 후 노생은 모두 권문세가(權門勢家)와 혼인하고 고관이 된 다섯 아들과 열 명의 손자를 거느리고 행복한 말년을 보내다가 황제의 어의(御醫)가 지켜보는 가운데 80년의 생을 마쳤다.노생이 깨어보니 꿈이었다.옆에는 여전히 여웅이 앉아 있었고 주막집 주인이 짓고 있던 기장밥도 아직 다 되지 않았다. 노생을 바라보고 있던 여옹은 웃으며 말했다.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라네" 다른기사 보기 저작권자 © 나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회원로그인 작성자 비밀번호 댓글 내용입력 댓글 정렬 최신순 추천순 답글순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닫기 더보기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비밀번호 닫기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본문 / 400 비밀번호 닫기 내 댓글 모음 닫기
한자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고 기업체 등에서 입사시험에 한자를 추가하는 경우도 늘었으며, 유치원 어린이까지도 한자 급수 시험에 응시하는 것이 필수가 됐다.또 수능시험에도 고사성어와 관련된 문제가 매년 꾸준히 출제되고 있다.고사성어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는 지혜의 보고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 마음의 핵심을 짚어주는 혜안이 번뜩이는 글들은 그대로 인생의 지침으로 삼을 만하다.이에 나주신문은 알기 쉬운 고사성어의 풀이와 표현의 유래가 된 고사를 매주 간단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邯 고을이름 한, 鄲 조나라 서울 단, 之 어조사 지, 夢 꿈 몽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말로 인생의 부귀영화는 일장춘몽과 같이 허무함을 뜻함.[유래]당나라 현종(玄宗)때의 이야기다.도사 여옹(呂翁)이 한단(邯鄲:조나라의 수도)의 한 주막에서 쉬고 있는데 행색이 초라한 젊은이가 옆에 와 앉더니 산동(山東)에 사는 노생(盧生)이라며 신세한탄을 하고는 졸기 시작했다.여옹이 보따리 속에서 양쪽이 구멍이 뚫린 도자기 베개를 꺼내주자 노생은 그것을 베고 잠이 들었다.노생이 꿈속에서 점점 커지는 그 베개의 구멍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있었다. 노생은 최씨(崔氏)로서 명문인 그 집 딸과 결혼하고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아가 순조롭게 승진했다.경조윤(京兆尹)을 거쳐 어사대부(御史大夫) 겸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올랐으나 재상이 질투하는 바람에 단주자사(端州刺史)로 좌천되었다. 3년 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조정에 복귀한 지 얼마 안 되어 마침내 재상이 되었다.그후 10년 동안 노생은 황제를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한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어느 날 갑자기 역적으로 몰렸다. 변방의 장군과 결탁하여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다.노생과 함께 잡힌 사람들은 모두 처형당했으나 그는 환관(宦官)이 힘써준 덕분에 사형을 면하고 변방으로 유배되었다.수년 후 누명에 의한 조임이 밝혀지자 황제는 노생을 소환하여 중서령(中書令)으로 제수한 뒤 연국공(燕國公)에 책봉하고 많은 은총을 내렸다.그 후 노생은 모두 권문세가(權門勢家)와 혼인하고 고관이 된 다섯 아들과 열 명의 손자를 거느리고 행복한 말년을 보내다가 황제의 어의(御醫)가 지켜보는 가운데 80년의 생을 마쳤다.노생이 깨어보니 꿈이었다.옆에는 여전히 여웅이 앉아 있었고 주막집 주인이 짓고 있던 기장밥도 아직 다 되지 않았다. 노생을 바라보고 있던 여옹은 웃으며 말했다.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