邯鄲之夢(한단지몽)

  • 입력 2010.03.01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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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에 대한 관심이 어느 때보다 높고 기업체 등에서 입사시험에 한자를 추가하는 경우도 늘었으며, 유치원 어린이까지도 한자 급수 시험에 응시하는 것이 필수가 됐다.

또 수능시험에도 고사성어와 관련된 문제가 매년 꾸준히 출제되고 있다.

고사성어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들의 현재와 미래를 이해하는 지혜의 보고라고 할 수 있으며, 우리 마음의 핵심을 짚어주는 혜안이 번뜩이는 글들은 그대로 인생의 지침으로 삼을 만하다.

이에 나주신문은 알기 쉬운 고사성어의 풀이와 표현의 유래가 된 고사를 매주 간단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邯 고을이름 한, 鄲 조나라 서울 단, 之 어조사 지, 夢 꿈 몽

한단에서 꾼 꿈이라는 말로 인생의 부귀영화는 일장춘몽과 같이 허무함을 뜻함.



[유래]



당나라 현종(玄宗)때의 이야기다.

도사 여옹(呂翁)이 한단(邯鄲:조나라의 수도)의 한 주막에서 쉬고 있는데 행색이 초라한 젊은이가 옆에 와 앉더니 산동(山東)에 사는 노생(盧生)이라며 신세한탄을 하고는 졸기 시작했다.

여옹이 보따리 속에서 양쪽이 구멍이 뚫린 도자기 베개를 꺼내주자 노생은 그것을 베고 잠이 들었다.

노생이 꿈속에서 점점 커지는 그 베개의 구멍 안으로 들어가 보니 고래등 같은 기와집이 있었다. 노생은 최씨(崔氏)로서 명문인 그 집 딸과 결혼하고 과거에 급제한 뒤 벼슬길에 나아가 순조롭게 승진했다.

경조윤(京兆尹)을 거쳐 어사대부(御史大夫) 겸 이부시랑(吏部侍郞)에 올랐으나 재상이 질투하는 바람에 단주자사(端州刺史)로 좌천되었다.

3년 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조정에 복귀한 지 얼마 안 되어 마침내 재상이 되었다.

그후 10년 동안 노생은 황제를 잘 보필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한 명재상으로 이름이 높았으나 어느 날 갑자기 역적으로 몰렸다. 변방의 장군과 결탁하여 모반을 꾀했다는 것이다.

노생과 함께 잡힌 사람들은 모두 처형당했으나 그는 환관(宦官)이 힘써준 덕분에 사형을 면하고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수년 후 누명에 의한 조임이 밝혀지자 황제는 노생을 소환하여 중서령(中書令)으로 제수한 뒤 연국공(燕國公)에 책봉하고 많은 은총을 내렸다.

그 후 노생은 모두 권문세가(權門勢家)와 혼인하고 고관이 된 다섯 아들과 열 명의 손자를 거느리고 행복한 말년을 보내다가 황제의 어의(御醫)가 지켜보는 가운데 80년의 생을 마쳤다.

노생이 깨어보니 꿈이었다.

옆에는 여전히 여웅이 앉아 있었고 주막집 주인이 짓고 있던 기장밥도 아직 다 되지 않았다.

노생을 바라보고 있던 여옹은 웃으며 말했다. "인생이란 다 그런 것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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