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강 장봉화 선생의 수필

아버지의 소원(2)

  • 입력 2010.04.26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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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화야, 우리도 기와집 짓고 한 번 떵떵거리고 살아보자"

아버지는 잔병치레가 많았다. 코에서 피가 자주 났고, 하루에 3번 이상 대변을 보시는 것 같았다. 153Cm 정도 되는 왜소한 체구에 중노동을 하기 때문에 힘이 달렸다. 돼지고기를 아주 좋아하셨다. 특히 비계를 잘 잡수셨다. 어떤 때에는 뱀을 잡아가지고 삶아서 드셨고, 옻칠을 내서 고기와 함께 드셨다. 아버지가 신경질을 내시면 어머니가 돼지고기를 한 근 사다가 국을 끓여 드렸다. 어머니는 "이것은 아버지 약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국물만 먹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고기를 한 점씩 건져주시면 우리는 다시 드렸다. 또 주시면 다시 드렸다. 몇 번 주고받다가 마지못해 미안한 마음으로 아버지 약을 받아먹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무렵 1500여 평 되는 논을 셋거리(나락 빚)를 내어 샀다. 재산이 불어난 것이다. 당시 나락 빚 이자는 100%이었으니 이것을 갚으려고 부모님이 얼마나 애를 쓰셨을까. 다른 사람 소유의 구릉지를 주인의 허락을 얻어 우리 손으로 개간하여 경작하였다. 임대료를 지불하고 사용하였다. 여기에는 고추, 고구마, 무, 깨, 감자, 조 등을 재배하였다. 내가 대학 재학 시절에 주인이 우리가 개간한 땅을 사라고 하여 많은 부채를 껴안고 매입하였다.

그야말로 자수성가를 하신 것이다. 아버지는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고 성장하여 집과 자녀, 자기 소유의 논밭의 주인이 된 것이다. 집 터 100여 평에 3,000평의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토지 대금에 영농자금, 자녀 양육비까지 겹치니 여유 있는 생활을 해보지 못하셨다. 친구들과 술 한 잔 사서 드시지 못하셨다.

초등학교 시절 한 번은 아버지를 따라서 남평장에 갔다. 지금도 그 자리 골목에선 장이 선다. 양철 지붕으로 된 여러 개의 건물 안에서, 건물 사이에 장이 선다. 지금 남평 오거리 부근에는 소시장도 열렸다. 한 양철집 안에는 막걸리, 소주, 국밥과 국수를 팔았다.

"천길이는 국수 먹는다야."

"먹고 싶냐? 그래 너 한 그릇 먹어라."

"아버지는요?"

"나는 배가 안 고프다."

나는 선지국에 말아진 국수를 나 혼자 다 먹었다. 아버지는 막걸리 한 잔 잡수지 않으셨다. 나와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20 리나 되는 길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잘 울지 않는 나이지만 지금 나의 두 눈에서 눈물이 줄줄 새어 나온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각인시켜 주신 다른 한 가지는 조상을 잘 모시는 일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할아버지, 할머니의 시신을 남평면 봉산리 선산 한 쪽에 모시고, 두 분 큰 아버지 내외분을 다른 한 쪽에 모셨다.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정성을 다하셨다. 문중 회의와 조상의 시제에는 조퇴를 시켜서라도 꼭 데리고 다니셨다. 어른이 된 후에도 시제와 성묘, 문중에 참여하는 것은 그 때 아버지의 가르침 덕택이다.

우리는 방과후나 휴일에는 집안일을 도왔다. 모내기, 김매기, 수확이나 타작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땔나무도 해 오고 저녁에는 새끼를 꼬아 가마니를 짜기도 하였다. 재미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 "이놈의 일 언제나 안 해먹을까?" 생각하지는 않았다. 매일 하는 일이니 당연한 것이었다.

이러한 다양한 경험이 나에게는 큰 자산이 되었다. 어떠한 고난이 닥치더라도 이겨낼 의지가 이 때 길러진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을 때 아버지는 매우 기뻐하셨다. 동네 친구들에게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네는 좋겠네."

"가르쳐 놓으면 덕을 보게 되네. 자네도 아이들 잘 가르쳐 보소."

그 친구의 아들은 다음에 나와 같은 고등학교를 나와서 공군 장성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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