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영희 선생과

전환시대의 사명

  • 입력 2011.12.15 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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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스승' '실천하는 지식인의 표상'으로 평생을 살아온 리영희 선생이 이 땅의 삶을 마감하고 훌훌 떠나갔다. 분단된 민족사의 격랑 속에서 평생을 '반지성과 반민주에 맞선 시대의 의인'으로 살아 왔기에 그가 남긴 빈 자리는 더욱 커 보인다. 리영희 선생은 언론인이자, 지식인으로서 사실을 넘어 진실을 추구하면서 살아왔던 사람이었다. 보이는 현상만을 보지않고, 그 속에서 조종하는 배후세력의 음모와 꼼수를 꿰뚫어서 폭로했던 것이다.

고 리영희선생은 1929년 평안북도 삭주군에서 출생했다. 산골출신인 것이다. 이후 서울에 와서 경성공고라는 실업학교를 나왔다. 해방 후 한국해양대학 영어학과를 다녔다. 1950년 국군통역장교로 입대한다. 대대장까지 역임하고 1957년 국군소령으로 전역한다. 유창한 영어실력에다 권총사격솜씨는 백발백중이어서 당시 전시체제에서 기득권을 누리면서 행세했을 법도 한데 그의 눈 앞에는 불행한 조국의 운명을 건져내는 일이 급하였던 것이다.

이어 조선일보 외신부장 시절부터 이 시대가 전환해야 할 시대인 것을 깊숙이 인식한다. 권력과 탐욕의 우상이 지배하는 세상을 향한 용감한 도전을 시도하는 것이다. 주류가 아닌 곳에서 출발한 고인은 교수로서 다른 사람들보다 실사구시(實事求是)적 공부를 많이 했다. 1988년 한겨레신문 이사를 맡으면서 평생에 가장 감격스러운 감회를 갖기도 한다.



1974년에 나온 리영희 평론집 '전환시대의 논리-아시아·중국·한국'은 새로운 민주주의 전사, 우상파괴자의 등장을 알린 그의 첫 단행본이다. 이 책은 유신체제 안에서 '전논'(轉論)이란 은어로 불리면서 학생과 노동자들 사이에 해일과 같은 폭발력으로 퍼져나갔다. 이 책에서 베트남 전에 개입하기 위한 미국의 '통킹만 사건조작' 사실을 폭로한 대니얼 엘스버그와 그 사실을 보도한 뉴욕 타임스의 보도태도를 치하했다. 그것은 진실한 언론의 승리이자, 동시에 진정한 뜻에서의 정부의 승리이기도 하다.

40여년이 지난 후 도널드 그레그 전 주한미국대사는 지난 3월 서해안에서 일어났던 '천안함 사건'이 베트남전 확전의 계기가 됐던 '제2 통킹만사건'이 될 것을 우려했다. 통킹만 사건은 통킹만에서 작전수행하던 미국 구축함이 북베트남으로부터 어뢰공격을 당했다는 주장으로서 베트남전 개입을 위한 미국의 조작극이었다는 것이 밝혀지지 않았는가? 사람들은 오늘에야 비로서 역사의 진실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1994년에 ‘새는 좌·우 두 날개로 난다’ 출판하면서 서문에다 이렇게 썼다. ‘나는 좌·우의 어떤 정치·이데올로기적 권력이건 진실을 은폐·날조·왜곡하려는 흉계에 대항해서 진실을 찾아내고, 그것을 바른 모습대로 세상에 밝혀내는 것을 글 쓰는 목적으로 삼고 일관하였다. 광적인 반공·냉전·전쟁애호·반평화통일 세력이 이 나라를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특히 그랬다. 균형은 새의 두 날개처럼 좌(左)와 우(右)의 날개가 같은 기능을 다할 때의 상태이다. 그것은 자연법칙에 맞고, 인간 사유의 가장 건전한 상태이다. 리영희 선생은 미국의 패권주의와 독재권력의 합작품인 냉전 이데올로기의 허구성과 반자주성을 폭로하는 사상의 투사였다. 1970-90년대까지 민주화 운동으로 통일운동으로 감옥에 끌려갔던 소위 운동권 세력들의 사상적 은사였다. 통일된 나라에서 인간답게 살아보고자 몸부림치는 모든 사람들의 사상적 선구자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그는 평생 독재자와 수구세력들에게 '급진좌경용공'의 수괴로 지목받아 왔음은 물론이다. 리영희 선생은 이 땅의 참된 지식인이 져야할 민족적 십자가를 지고 고통과 질곡의 세월을 살아왔던 것이다.



생전의 리영희 선생은 광주와 인연을 깊이 맺었다. 유신독재가 극한에 이르렀던 1970년대 말이었다. ‘우상과 이성’ 등의 책을 낸 그는 반국가단체를 고무·찬양했다는 이유로 2년여 고통을 겪던 중1979년 광주교도소로 이감되었다. 국보법 위반 사범들을 수용한 특별사동 안 0.9평의 감옥에서 1년을 보냈다. 다시 1980년 5월 17일 밤 11시 30분 자택에서 중앙정보부로 끌려간 후 60일간 고초를 겪고 풀려나왔다.

출감 후 부인에게서 광주 학살 이야기를 처음들었다. '수천명을 학살..., 군대가?.... 광주에서'라고 말을 더듬었다고 한다. 나중에야 두 달전 발행된 신문을 보고서 5. 18 민중항쟁 ‘배후조정자’로 몰렸다는 사실도 알았다. 그는 무엇 때문에 세상의 비난과 차가운 감방을 오갔어야 했던 것인가? 리영희 교수에게 있어 광주는 ‘역사의식과 항쟁의 고향’과 같은 곳이었다. ‘광주는 폭력과 부정에 항의하여 목숨을 바치는 민주주의 시민의 용기와 감동적인 희생정신을 뜻하는 성소가 되었다.

이 땅의 민중들과 시민들은 다시 힘을 모아야 한다. 국민의 70%가 반대하는 4대강 사업강행으로 천혜의 환경이 파괴되는 현장을 가보라! 대안없는 대북강경정책과 쌀이 썩어나도 북한동포에게 보내지 않는 MB 정권의 외고집이, 천안함 사태, 연평도 사태와 어찌 무관하겠는가? '햇볕정책' 탓만하고, 외교에도 안보에도 실패한 귀머거리 이명박 독재정권에게 제발 남은 임기라도 정신차려, 대북관계회복하고 구멍난 안보장치와 국방을 든든히 하라고 당부하는 바이다. 연평도 민간에까지 포탄을 쏘아댄 북측에 대해서는 엄중히 경고해야 한다. 서해 5도 지역은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화약고와 같은 위험지대이다. 서해 5도 지역을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로 만들어 공동어장, 통일을 위한 교류, 경제특구를 위한 운송, 평화지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남북대화에 나서야 한다는 제언을 하고 싶다. 우리 민족 모두에게 독재권력과 미국의 군산복합체, 패권주의적 지배로부터 자주·민주·평화통일로 전환해 나가야 할 사명과 함께 남북의 대결상황을 종식시키고 다시 한번 대화의 장을 만들어 평화를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고인은 몇 달 전에 두 가지 유언을 남겼다. 첫째는 '화장해 달라'는 것이었다. 둘째는 시신을 '광주에 묻어달라'는 것이었다. 고 리영희 선생은 당신의 사상과 삶의 방식을 따르고자 하는 수많은 이 땅의 지식인, 시민운동가, 학자, 종교인, 정치인, 깨어난 민중들, 등 당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들의 애도 속에 광주 망월동 5. 18 국립묘지에 묻혔다. 그의 몸은 한 줌의 재로 남아 흙에 묻힌 것이다. 그러나 그의 정신과 사상 그리고 그의 민족사랑, 민중사랑, 진리사랑의 정신은 이미 부활하여 칠천만 겨레의 가슴에 솟구치고 있지 않는가? 오늘날 민족의 십자가는 분단이요, 민족의 부활은 평화통일이다. 존경하는 리영희 선생님 역사적 부활의 현장에서 칠천만 민족과 함께 기쁨으로 다시 만나시자구요!



김 병 균 목사

(고막원교회, 광주전남 6. 15 공동선언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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