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열녀 정표를 받은

나덕헌의 딸과 며느리

(3) 나덕헌이 청태종 홍타시로부터

받은 연적을 일본인에게 뺏긴 후손

  • 입력 2011.12.16 11:53
  • 기자명 나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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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디 거기에 인자 딸이 둘인디, 한나는 먼저 이애기헌 장흥 위옥과. 위옥과 헌티로 가고 여우고, 한나는 남평 윤씨 윤항헌테로 여우고. 그랬는디, 윤항헌테로 간 딸은 열녀 정표를 받었제, 나라에서.

그래 어트게 해서 열녀가 되았냐 허먼. 나덕헌이라는 그 할아버지가 계신디. 임진왜란 때, 저그 무안 주룡서 살었어라우. 일로면 주룡. 거그 살았는디, 그 때 친정엘 왔어. 친정엘 왔는디, 와가꼬 인자 있는디 정유재란이 났어. 근께 '왜군이 몰려온다.' 헌께 기냥, 잽히먼 인자 죽던지 큰 곤욕을 당하그던이라잉.

그런께 인자, 그 말허자먼 시누 남매 끼리, 말허자면 요새 말로 올케허고 자기허고. 아 이래 딱 보듬고, 치매 끈으로 둘이 서로 몸 딱 둘러 꿰매고. 그 주룡 거가 강이 가까워라. 강, 강에 가 빠져 죽어버렸어. 그래 지금 말허자면 시체도 못 찾어버렸지. 지금 같으먼 찾을 것이요. 난리 때라먼 찾을라나 모른디. 그래서, 두 시누 남매가 거그 빠져 죽어버렸어요. 그래서 열녀라, 열녀 인자 정표가 나왔지. 나라에서. 그 올케도 열녀가 되고. 열녀 정표가 나오고.

그래서 사짜 침 그 할아버지와 아들 육 형제, 또 손자들. 아들 육 형제가 난 손자들. 자기부터서 아들 손자들, 삼 대에서 삼강이 났다 그 말이여. 삼강이, 삼충신, 사열부, 오효자. 이렇게 났어요. 근디 요렇게 삼 대에서 이렇게, 충효열 삼강이 난 집은 조선 성씨에도 없다. 그런께 삼강이 멫 대에 났던 디는 그냥 있는디, 삼 세에서 이렇게 삼강이 난 집은 없다 그것이여. 그런 이애기가 있어라.





이 양반 이애기, 내가 먼저 다 했는디, 거. 중국서 인자 나올 때, 중국 왕이 그 연적을 주었어라. 연적을 준께, 연적을 그 놈을 갖고 나가겠어. 나와가꼬 인자 보관하다가, 뒤에 자손이 대대이 그 놈을 인자 보관해서 인자 지켜나갔거든이라우, 가지고.

근디 그 자손이, 저그 전라북도 무장서 살았어라우. 지금도 그 자손이 거그서 멫이 사요. 근디 거그 사는 자손이, 종손이 요 건너 평촌이라는 동네로 이사를 왔어라. 평촌에 가서 우리 나가들도 많이 살거든이라우. 그 때 나참봉이라고 허는 분이 인자 거가 사시고. 이자 부자로.

평촌. 왔는디. 아 인자 무장서이, 나주 나가라고 하먼서 인자 충열공 자손이라고 허먼서 인자 이사왔다고 인자 나참봉한테 가 인사를 헌께. 뭐 인제 증거가 없지라잉. 증거가 없어. 근께 가난한께 인자 보첩도 인자 없던가, 안 갖고 왔던가 몰라요. 그런께는. 그 충열공 그 할아버지의 그 유물, 유물. 벼슬헌 교지니 충자 시호 받은 그런 교지, 또 중국서이 그 연적, 갖고왔다는 그걸 딱 갖고 참봉한테 갖고 갔어요.

"이것이 충열공 할아버지의 이러이러헌 유물이다."

그런께 인자 분명히 이자 그 자손이 분명허고 헌께 있는디. 그 연적을, 그 사람이 도로 자기 집으로 갖고 왔으먼 쓴디, 참봉 그 분이,

"놔 두라."

고 말이야.

"여기다 좀 두라."

고. 그래 거기다 두었던갑디다.

그 때가 언제냐 허면, 일한합방헌 직후여. 일본허고 합방헌 인자 조선이 합방헌 직훈디. 근께 면에 와서 인자 반남면에서 인자 일본 순사가 와서 있고 그러지라잉. 그 때 여, 여 잘가진 사건 땜에, 여그 평촌서 총소리가 대번 났더라우. 부락민 허고 참봉 허고 일본 그 경찰들 허고 싸우고 말이여잉. 그런 사건이 여러 사건 있었어라.

그런디 인자 그 주재소 소장인가가 인자 늘 거글 오지라잉. 놀러, 참봉 집으로. 오는디, 참봉이 그걸 내놓고 자랑을 했어.

"이러이러 이 연적이 중국서이 이렇게 해서 온 연적이다."

그런께, 헌디, 그것 참 보물이여. 뭣이 보물이냐? 연적을 이렇게 놓고 글씨를 써가먼 물을 안 갖다 붓어요. 물을 안 붓어. 안 붓고, 요렇게 입김으로 후 허면 물이 생겨라. 그런께 보물이제. 호호 이렇게 불먼, 물이 생겨나 부러. 그럼 그 놈 가지고 글씨를 써요. 아, 일본 놈이 그것을 보고는, 아 이 놈이 뺏아갈라고 기냥 애를 쓰드랍디다.

그라곤, 필히 일본 놈헌테 뺏겨부렀어. 그 보물을. 지금 그런 것이 있다고 허먼 가보로 치먼, 뭐 여기 억대도 더 될 것이요? 응. 그런께 그 언제고 병자호란 후에 그 효종이 거, 중국서 연적 갖고 왔다 안 헙디여? 그런 연적, 그런 건가 몰라요. 그런 연적을 일본 놈헌테 뺏겨부렀어. 그 이외 인자이, 그 모도 벼슬허신 교지 같은 것은 다른 것은 다 있어요. 지금도. 다른 것은 지금도 갖고 있어요. 좋은 보물 잃어버렸지라잉.





* 참고 :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성씨와 본관> 자료 중 나덕헌(羅德憲)에 대한 기록



1573(선조 6)∼1640(인조 18).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나주. 자는 헌지(憲之), 호는 장암(壯巖). 아버지는 이성현감(尼城縣監) 사침이다.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을 거쳐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만(張晩)휘하에서 종군하였다. 특히, 안현전투(鞍峴戰鬪)에서는 큰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에 봉해졌다. 외교적 수완이 능하여 여러 차례 심양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이후 길주목사(吉州牧使)를 거쳐 1635년에는 창성부사(昌城府使)·의주부윤을 역임하고, 1636년 춘신사(春信使)로 다시 심양에 갔는데 동지(同知) 이확(李廓)과 심양에 도착하자, 후금의 태종은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황제(皇帝)를 칭하며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그때 우리나라 사신에게도 경축반열에 참석하라고 하였으나, 하례를 완강히 거부하다가 옷이 찢어지고 갓이 부서지는 구타를 당하였다. 구타와 회유를 거듭하여도 시종 거부하다가, 청나라가 볼모를 요구하는 국서를 주어 돌려보내기로 하자, 내용을 알기 전에는 받을 수 없다고 받지 않았다. 100여명의 기병으로 통원보(通院堡)까지 호송되었는데, 기병의 호위가 풀리자 통원보의 호인(胡人)에게 국서를 맡기고 귀국하였다.

이 사실을 안 삼사(三司)와 조복양(趙復陽)을 중심으로 한 관학유생들은 황제참칭(皇帝僭稱)의 국서를 받았다 하여 논핵하였다. 영의정 김류까지 가세한 조정의 거센 척화론으로 위기에 몰렸으나, 이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의 적절한 변호로 극형만은 면하고 백마산성(白馬山城)으로 유배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후 과거 춘신사로 심양에 가서 하례를 거부, 항거한 사실이 밝혀져 유배에서 풀려나 삼도통어사로 특진되었으며, 1639년 벼슬에서 물러났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며,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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