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순국현장 뤼순감옥에 가다(2)

  • 입력 2011.12.16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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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련공항에 도착하자 일행은 대련시를 지나 여순감옥으로 향하였다. 대련(다렌)시와 여순(뤼순)은 자동차로 40분쯤가는 지근거리였다.

대련은 역사적으로 랴오둥 반도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하얼빈으로 연결되는 남만주 철도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1895년 4월 전후처리를 위한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에서 청은 일본에게 대만, 요동, 팽호도를 할양하였다.

이후 러시아는 독일·프랑스와 제휴하여 일본에 대해 동양평화에 해롭다는 구실로 요동 반도를 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다. 이 사건이 이른바 삼국간섭이다. 1895년 러시아는 청으로부터 관동주(대련, 뤼순 등)를 조차하였다. 대련은 1897년 러시아가 항구를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발달한 도시였다. 러시아가 동청철도의 종착역을 마련해 '다리니'(멀다)라고 명명했다.

뤼순은 중국 랴오둥 반도[遼東半島]의 남쪽 끝에 있는 해군 군항도시이다. 1년 내내 얼음이 얼지 않고 수심이 깊어 항구로서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에 의해, 동년 5월 말에는 일본군이 무혈 입성하여, 전후 1905년 포츠머스 조약을 맺어 일본에 조차권을 양도했다.

1909년 10월 26일 9시 30분 하얼빈 역에서 한국 의병 참모중장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의거는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는 20세기 초의 제국주의 열강의 확장에 대한 일대 타격과 질타로서 피압박 민족과 세계민중들을 크게 고무하였던 것이다.

필자는 안중근 의사가 갇혀 있었던 여순감옥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 악랄한 일제의 모진 탄압과 옥중고초는 오죽했으랴! 이번 여행이 필자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적절한 기회였다.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의 광석동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을 하였던 부유한 가정이었다. 그는 고려말기 유명한 유학자 안향(安珦, 1243-1306)의 26대 손이다. 안중근의 모친 조씨는 3남 1녀를 출산했다. 안중근이 장남이고 정근(定根)과 공근(恭根)이 있었다.

안중근이 출생할 때, 가슴에 검은 점 일곱 개가 있었다. 그 모양이 북두칠성을 닮았다하여 응칠(應七)이라 지었다. 안중근의 동년(童年)시기는 조선이씨왕조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와 같이 뒤흔들리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이 겹쳤던 동란의 시기였다. 안중근은 을사늑약후 1906년 삼흥학교를 건립 인재양성에 주력하였다.

안중근이 갇혀있던 때는 일제가 여순을 차지하고 있을 때였다. 여순감옥은 원래 러시아인이 세운 병원건물이었다. 병원을 개조해서 만든 감옥이었기에 감옥 내부에 러시아 건축양식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붉은 담장에 둘러싸인 감옥은 건물이 여러 동이 있었다.

안의사의 방은 일반수인들과는 달리 간수부장실의 바로 옆에 있었다, 3-4평 쯤 되어 보이는 길쭉한 방이었다. 여기에는 책상과 의자도 놓여 있었어서, 집필과 서예를 하는데 그다지 비좁은 공간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였다.

국제지사 전시관(The international soldiers in Luhsun' 입구에는 전 중국 수상 주은래(周恩來)의 안중근 의사에 대한 평가가 담긴 액자가 걸려 있었다. '중일, 갑오전쟁 후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항거하는 중국 · 조선인의 투쟁은 본세기 초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새겨져 있었다.

안의사 기념실에는 그의 독립운동 공적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07년 연해주로 망명 의병운동에 참가,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독립특파대장, 의령지구 사령관으로 일군(日軍)과 격전하였다. 1909년 동지 11명과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 1909년 10월 29일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사살하고 체포되어 1909년 11월 3일 여순감옥(旅順監獄)에 수감되었다. 1910년 2월 14일 일본관동지방법원에서 6차레의 재판을 거듭한 끝에 사형이 언도되었다. 1910년 3월 26일 31세의 꽃다운 나이에 일본감옥에서 사형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옥중저서로는 '동양평화론'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공로장이 수여되었다" 국제지사전시관에는 일제강점시대의 애국독립지사였던 신채호 선생, 이회영 선생의 기념자료도 함께 전시돼 있었다.

여기에는 안의사의 고향과 가족사진, 1909년 의거당시의 하얼빈 역사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당시에 사용했던 권총, 안중근 의사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 지사의 사진, 관동지방법원에서 재판받던 안중근 의사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또한 1910년 2월 14일 관동도독지방법원의 안중근 의사 사형언도 기록, 사형집행 직전에 동생과 홍신부와의 면회사진이 걸려 있었다. 또한 감탄하는 바는 그의 옥중에서의 서예활동이었다. 구구절절이 애국과 독립의 투혼이 서려있는 명필, 명문장이었다.

오늘날 우리 민족과 동북아 3국이 꼭 기억해야 될 바는 안의사의 동양평화론이다. 서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그는 제국주의 각축이 낳는 문제를 정확히 진단했다, '.... 젊은 청년들을 훈련시켜 전쟁터에 몰아넣어 수없이 귀중한 생령들이 희생물처럼 버려져, 피가 내가 되어 흐르고 주검은 산을 이룬다' 그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환란의 시기엔 ‘동양사람이 일치단결해서 방어함이 최상책’임에도 일본은 이러한 대세를 못보고 오히려 중국과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을 도모하니 '동양평화를 위해 의로운 전쟁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이토를 사살한 이유를 당당히 밝혔던 것이다.

그의 동양평화론은 1세기 후 오늘의 현실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자본주의의 각축은 더욱 심해졌다. 60년 이상 분단된 민족의 갈등은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한반도 평화통일운동은 동북아 평화와 직결된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대한민국 어디에도 이렇게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고, 그의 애국독립정신과 투쟁사를 선양하는 기념관이 있을지 모르겠다.

중국 관광이라면 어느 곳보다 여순감옥 국제지사실 안중근 기념실을 찾아야 민족의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정신과 동북아 평화에 대한 염원이 솟구쳐 오를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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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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