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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획나주지역 현대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①
의병궐기계획 중 밀고로 일본헌병에 참살
들어가는 말
최택현 선생 일가의
의병활동 발자취를 찾아서
글 싣는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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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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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우리 인간의 삶의 발자취이다. 그것이 아무리 위대한 사람일지라도 일반인과 별반 차이없이 그 시대를 살아가면서 고민하고 활동했던 영역을 후세들이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현대사는 질곡의 역사요 진실이 감추어진 부분이 너무 많고 왜곡된 부분도 많은 게 사실이다. 현재 전체적으로 역사학자들이 왜곡을 밝혀내고 사실적인 내용으로 진실을 찾아가는 작업도 이루어지고 있다.

지역의 역사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기록되지 않는 근ㆍ현대사 부분을 발굴해 나주지역의 역사를 바로잡는데 이번 기획취재의 의미가 있다고 본다.

특히 일제시대인 1930년 이르러 시작된 적색농민운동과 사회주의 운동 그리고 해방이후 미군정에 반발해 일어났던 건국준비위원회의 활동, 인민위원회, 보도연맹사건 등을 발굴 새롭게 정리되어야 한다.

나주지역은 봉황양민학살사건, 다도양민학살사건, 세지동창양민학살사건, 온수동 양민학살사건 등 다른 지역과 달리 유독 사상(이념)으로 인한 학살이 이루어진 특징을 보이고 있다. 봉황과 다도, 동창양민학살사건에 대한 진상규명은 이뤄졌지만 아직 온수동양민학살사건에 대해선 정확한 규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 이에 대한 진상규명도 아울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나주신문은 이에 대한 진상규명을 위해 2001년부터 유족회와 함께 활동을 벌여 정부로부터 진상규명을 위한 국회진상위까지 구성해내 우리의 질곡된 역사를 바로 잡는 지역언론으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나주의 역사를 바로 세우고 지역민 스스로 나주인이라는 자긍심을 갖는 계기로 삼는 것이 이번 기획의 또 하나의 목적이다.

4년 전인 2007년 재경나주향우회장을 지낸 최병석씨와 수성최씨 종친들은 재야사학자이자 후세변호사 연구모임의 정준영 회장을 찾았다.

구한말 의병활동으로 순국한 최택현(당시 48세) 최윤룡(당시 26세) 최광현(당시 55세) 최병현(당시 47세)의 독립운동 활동을 입증하여 독립유공자로 지정받기 위해서다.

최병석씨와 정준영씨는 네 분의 독립유공자 지정에 많은 노력과 자료 수집에 열정을 다 바쳤다. 당시 국가보훈처에서는 "일본의 공식 재판기록이 없다"며 독립유공자 지정에 난색을 표한 상태였다.

재야사학자 정준영씨는 "당시 일제는 밀고자 보호 등을 위해 재판기록 자체를 안 남기고 현장에서 즉결 처분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말한다. 이어 그는 국립중앙도서관 특별코너에 보관되어 있는 1914년판 기우만선생의 송사문집과 1912년 오계수선생의 세보지장록에 최택현 일가의 활동이 나온다는 것.

호남창의(의병)대장을 지낸 기우만 선생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 기정진 선생의 손자로 구한말 의병운동을 주도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인물이다.

최택현 선생의 의병활동을 찾기 위해서는 1900년대 초 시대상황을 먼저 살펴봐야 한다.

제2기 한일역사공동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은 아직도 '고종이 을사조약의 주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그러나 그 조약의 체결 주체인 '고종황제의 서명과 국새의 날인'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당시 외무대신 박제순의 직인만 찍혀 있을 뿐 고종 황제의 비준은 빠져 있다.

따라서 이 조약은 국제법상 원칙적으로 무효임이 증명된다.

구한말 당시 국내외로 세인의 이목이 집중된 대궐 안팎에서도 위와 같은 가공할 사기극이 연출된 것을 보면 삼남지방이나 이곳 나주시 다시면 충신열사들을 비인간적으로 몰살시킨 것쯤이야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였을 것이다.

최택현 일가는 다시에서 보기 드문 '솟을 대문집, 동몽교관댁'이라고 하면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오른팔인 흥양현감 최희량장군의 십대손들로 지금도 이곳 마을 어른들의 자랑이자 자긍심이다.

최택현과 최윤룡은 부자간이고 최광현과 최병현은 최택현의 4촌이다. 나주지역 명문가인 수성최씨 일가 네 분은 국가누란의 위기에 사내대장부의 역사적인 소명의식을 갖고 의병궐기 계획을 세우던 중 밀고로 일본 헌병에 붙잡혀 그 자리에서 총살당해 재판기록이 남아있지 않는 것이다.

당시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실록에는 "일본 낭인들에게 우리 국모를 빼앗기고 국토마저 유린당하고 구한국 군대마저 강재해산 당함에 끓어오르는 의분을 억제할 수 없어 1907년 가을에 전국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의병들이 봉기할 때 창고에는 그 의병들을 배부르게 먹일 곡식이 한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와 같이 어려운 가운데 격한 의분을 이기지 못하고 윤룡의 부친 택현씨는 위풍이 강직하고 당당하여 종형 광현씨와 종제 병현씨 등과 분기가 탱천하여 "왜적을 섬멸하지 않으면 나도 생존하지 않으리라"는 결의를 굳게 다짐하였다. 그러나 공을 좋아하지 않는 자가 인근 영산포 현병대에 이를 제보하니 왜적들이 크게 기뻐하며 그 밀고자에게 큰 상을 주었다. 영산포 현병대는 작전상 이 마을 북쪽으로 돌면서 피아간에 혈전을 벌린 후 이곳 '동촌마을(다시면)'에 이르렀을 때가 1909년 8월 8일이었다.

그들은 최택현 선생 부자와 광현, 병현 형제 4인을 꽁꽁 묶어 인근 대곡촌으로 끌고 가면서 불문곡직하고 무수히 구타하면서 "공모한자가 몇 명인가, 이실직고하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협박했다.

최택현 선생은 "지금까지 너희 왜적들이 한 짓을 생각하면 우리 국민 모두가 너 왜적들의 간을 씹고 싶은데 어찌하여 나에게 공모한자를 묻는고. 오늘 내가 성공하지 못한 것은 하늘의 뜻인 하니 죽인다고 하여 두려워할 내가 아니다.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한 것이 한스럽구나"고 말했다.

더 이상 캐낼 것이 없다고 판단한 일본헌병들은 다음날 수성최씨 일가 네 분을 무안군 진례면(현 함평군 학교면)의 망월촌으로 끌고 가서 총살시켜 버렸으니 그때가 1909년 8월 10일(음)이다고 기록되어 있다.

정준영씨는 이와 같은 기록이 "국립중앙도서관 특별코너에 보관되어 있는 1914년판 기우만 선생의 송사문집과 1912년 오계수 선생의 세보지장록에 나와 있다"고 밝혔다.



최택현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되다



당시 현장을 목격했다는 최윤로 선생은 최택현 일가 네 분 모두 무안군 진례면에서 피살되기 직전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럽다"고 증언한다. 또 박민수 의병장의 소재를 찾는 일본군에게 죽음의 문턱이라 할지라도 말하지 않는 의연함을 보였다. 이 증언은 최씨세보 지장록과 모두 일치하고 있다.

위 모든 자료는 서슬이 시퍼렇던 1909년 일제초기부터 1945년 8월 15일 해방될 때까지의 기록이다. 그 기록을 잘못 남겼다가 일본헌병대에 발각될 경우 그 후손들에게 엄청난 시련을 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다.

박민수 의병장과 최병현 선생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박 의병장의 선친 박찬옥 선생과 최병현 선생의 선친 최기오 선생은 1894년에 나주목사 민종열을 도와 나주읍성을 지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박민수 의병장은 그 후 위 네 분이 돌아가신 동촌마을로 피신해 상당기간 숙식을 제공 받았다는 사실도 해방이후에야 겨우 알려지게 된 것이라고 정준영씨는 말한다.

1909년 8월 10일(음) 네 분의 장례를 치루고난 일주일 후 나주 임씨(최운룡 선생의 부인) 또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러한 사실을 기우만 선생은 열부라 칭송하면서 "부친은 나라를 구하다고 죽고 아들은 아버지를 구하다가 죽고 부인은 남편을 따라 죽었으니 각각 그 도리를 다하여 한 집안에서 일가삼강을 이루었다"고 송사문집에 기록했다.

다시 동곡리 동촌마을에는 '유인 나주 임씨'의 비석이 서있다. 비석은 대부분 뒷면에 망자의 간단한 약력을 새기는 것이 일반적이나 임씨의 비석엔 아무런 글도 적혀있지 않고 있다.

정준영씨는 "일제강점기 36년간 의병활동하다 처형된 남편을 따라 죽었다는 내용을 어찌 동네 한가운데 있는 비석에 남길 수 있었겠느냐"고 설명한다. 프랑스 '라 크로아지'에 실린 1905년 5월 21일에 찍은 의병공개학살 사진이 최씨 일가의 '직결처분‘을 말해주고 있다. 일제는 1910년 한일합방 될 때까지 재판이나 소명의 기회도 없이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무법천지로 만들었다.

2010년 국가보훈처는 제65주년 광복절을 맞아 의병으로 순국한 나주 수성최씨 일가 최택현ㆍ최광현ㆍ최병현ㆍ최윤용 선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최택현 일가의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에 앞장서온 재야사학자 정준영씨는 마지막으로 "일제강점기를 전후로 일가족이 3명까지 참살 당한 기록은 있지만 5명이 함께 몰살한 기록이 발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고 말했다. 정씨는 우리지역 궁삼면토지투쟁과도 관계가 깊은 '일본판 쉰들러 리스트' 후세 다쓰지 변호사를 연구하면서 서울 서대문 형무소 복원에 앞장선 인물이다. 기획취재반 김진혁 이현영기자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나주는 의향의 도시로 널리 알려져 있다. 역사문화의 도시로서 제2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나주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고대문화에 대한 발굴과 복원은 이뤄지고 있지만 아직까지 현대사에 대한 부분은 개괄서조차 없는 실정이다.

민족운동의 중심지였던 나주지역이 현재까지 구체적으로 역사에대한 재조명이 이뤄지지 못하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의향으로서 나주, 역사문화도시로서의 나주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이에 1910년 한일합방부터 1980년 5·18 광주항쟁까지의 현대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나주지역의 현대사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또 이 기획취재를 통하여 의향의 나주인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역사문화도시로서의 정체성을 찾고자 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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