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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획나주지역 현대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③
조직적 민족주의 운동인 11ㆍ27 나주봉기
글 싣는 순서
■ 나주청년동맹의 조직적인 활동
김준 기자  |  najuk2010@naju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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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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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학생 청년 대중이여, 궐기하라!

제국주의적 침략에 반항적 투쟁으로써

광주 학생사건을 지지하고 성원하자!

우리는 이제 과거의 약자가 아니다.

반항과 유혈이 있는 곳에

결정적 승리가 있는 것은

역사가 이를 입증하고 있지 않는가!

조선 학생 청년 대중이여!

군들은 저 제국주의 단말마 일본 이민배들의

광만적 폭거를 듣고 있을 것이다.

(중략)

단결하고 궐기하라! 전투적 반항으로써

학살당하고 있는 광주 학생을 지지하고 성원하자.

금후의 역사는 우리의 것이다.







나주지역 학생들의 11ㆍ27 봉기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당시 일제에 항거한 청년학생들의 조직적 운동을 알아야 한다. 이는 나주학생들의 투쟁이 단순한 일회적 운동이 아니라 조직적 지속적인 운동이라는 점이다.

일제는 1919년 3ㆍ1운동 이후 식민통치의 강압적인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로 변화했다. 문화정치는 명목상이지만 군인뿐만 아니라 민간인도 총독에 임명할 수 있고 군 헌병이 경찰역할을 하던 것을 일반 경찰로 대체하고 일반관리와 교원들까지 금테제복을 입고 칼을 차는 것을 폐지하였다. 또 한국인의 관리임용과 대우를 개선하였다. 부분적이지만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허용하고 한국인의 문화와 관습을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말뿐이었고 제대로 시행된 것은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년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여성운동, 경제자립운동 등 다양한 방면에서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이 전개되었다. 나주지역도 청년ㆍ학생ㆍ노동ㆍ농민 등 민족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11ㆍ3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에 나주에서 불을 댕긴 것이다.

나주지역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된 것은 청년운동이다.

청년운동은 1920년 1월 나주수양구락부를 나주청년수양회로 개칭하고 야학부를 설치해 영어ㆍ일어ㆍ조선지리ㆍ역사ㆍ상업부기 등을 가르치며 토론회와 강연회를 개최하면서 시작되었다. 1922년 나주청년회관의 준공과 함께 나주청년회로 개명되면서 본격화되었다. 하지만 초창기 나주청년회는 유지들로 구성되어 민족운동의 성격을 갖기는 어려웠고 활동도 저조하였다.

1925년 11월 임시총회에서 집행위원진이 소장층 청년 운동가들로 바뀜으로써 유지들에 의한 청년운동에서 혁신적인 청년운동 단체로 변모하였다. 특히 이 시기 효종단이라는 사상단체가 당시 서울에서 활동하던 이항발의 지도와 박공근ㆍ최남구의 주도 하에 만들어졌다. 다수의 나주청년회원들이 이에 참가하여 청년회는 점차 사회주의적인 색채를 띠어 갔다. 1926년 11월 나주청년회의 회장은 박준삼이 맡았고 서무부 위원 양장주ㆍ김상달, 경리부 위원 정성면ㆍ김형호, 지육부 위원 박공근ㆍ박영정, 체육부위원 이민영ㆍ이회연, 산업부위원은 정복기ㆍ정창면 등이었다.

나주청년회는 1927년에 이르러 나주청년동맹(위원장 박준삼)으로 개편하여 맹원 교양, 회관 건축, 야학 활동과 연극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농민과 노동자 그리고 부인들을 상대로 야학을 운영하였다. 일부 사회운동가들은 야학을 이용해 사회주의 의식을 전파하였다. 또 1929년 11ㆍ3학생독립운동 사건 당시 나주청년동맹 회원들이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이러한 조직적 활동이 결국 광주학생운동의 서막을 올리는 밑받침이 된 것이다.



보통학교 학생들도 시위참여



1929년 11월 3일 1차 시위가 일제의 진압으로 막을 내리고 학생들은 2차 시위를 준비했다. 이른바 12월 항쟁이 막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위 격문은 당시 학생들이 2차 시위를 시작하면서 뿌려 광주학생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된 것이다.

12월 항쟁이 전개되기 전에 나주지역 학생들은 조직을 점검하고 2차 봉기를 준비하였다.

11ㆍ3 학생시위운동의 도화선을 만들었던 박준채의 고종사촌인 나주보습학교 학생 유찬옥은 나주지역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위를 계획한다.

유찬옥은 신간회나주지회와 나주청년회 회원이던 박공근ㆍ박동희ㆍ양영택 등을 찾아가 "사건의 발단지인 나주의 한국인 학생들이 묵시하고 있어서는 안 되며 석방을 위해 선전 삐라를 살포하고 시위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유찬옥은 박공근 등의 지도 아래 나주농업보습학교, 나주공립학교 학생들도 함께 불러 시위에 대한 협의를 가졌다.

거사일은 본래 17일로 정해졌으나 보습학교의 농번기 방학이 17일부터 시작되어 27일로 연기되었다. 유찬옥은 '대중이여! 학생 제군이여! 아는가? 우리들이 얼마나 강압과 폭압을 받고 있는가를'이라는 제하에 격문을 만들었다.

11월 27일 아침 이창신ㆍ이채후ㆍ김성남 등은 나주농업보습학교 학생들에게, 이성환ㆍ원복준 등은 보통학교 5∼6학년 학생들에게 시위운동에 참가하도록 독려하였다. 나주농업보습학교 학생 47명과 나주보통학교 5∼6학년 130여명은 나주 12시 학교 휴게시간이 되자마자 교문을 뛰쳐나와 시위운동에 들어갔다.

학생들은 교문 앞에서 건네준 전단을 받아들었다. 홍민후ㆍ이창신 등이 맨 앞에 서서 시위대를 이끌었다. 학생들은 조별로 나누어 시내를 행진한 후 다시 나주협동상회 앞에서 집결하여 나주군청 앞을 통과하여 나주시장에서 '조선민중만세' '조선학생만세'를 외쳤다. 학생들은 다시 과원동 방면으로 우회하여 행진하단 중 그곳에서 경찰의 제지를 받고 해산하였다.

나주학생봉기의 가장 큰 특징은 광주에서도 볼 수 없었던 보통학교 학생들의 봉기였다. 당시 16∼18세 정도에 해당하는 보통학교 학생들의 봉기는 11월 3일 광주학생봉기의 진원지가 나주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조선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나주에서는 광주사건에 극도로 분개하여 십일월 이십칠일에 나주실업학교 생도가 일대 시위운동을 하다가 경관과 충돌되어 경관측에 부상자 다섯 명이 났는데 그 학생들 속에는 나주보통학교 오륙학년 생도들도 있었다"

이 사건으로 보습학교 학생 신간회 나주지회 및 청년동맹 회원은 물론 보습학교 학생들이 연행되었다. 시위를 주도한 박공근ㆍ박동희ㆍ양영택ㆍ유찬옥ㆍ홍민후 등은 체포 기소되어 1930년 3월 5일 광주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1930년 3월 5일 열린 언도공판에서 재판장은 박공근 징역 1년, 유찬옥ㆍ박동희ㆍ양영택 징역 10월, 홍민후 징역 8월을 각각 선고하였다.

그러나 나주학생들의 저항은 11월 27일의 봉기로 끝나지 않았다. 이틀 뒤인 11월 29일에는 영산포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맹휴가 일어났다. 또 유찬옥ㆍ홍민후에 대한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이창신 등 나주농업보습학교 학생들과 원복준 등 보통학교 학생들은 1930년 2월 10일 정오 제2차로 시위를 벌였다. 나주학생들은 11ㆍ3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 10월 30일의 나주역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10월 31일의 통학열차안의 사건, 11월 1일의 광주역에서의 한일 학생들의 충돌, 11월 3일 광주고보생들의 1차 봉기, 11월 12일의 2차 봉기 등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리고 11월 27일의 나주농업보습학교와 나주보통학교 학생들의 봉기에 이어 1930년 2월 10일 2차 봉기 등에 이르기까지 나주지역 내에서 줄기찬 항쟁을 계속하였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해 30여명에 이르던 광주 통학생들은 전원 퇴학당하였고 구속 기소된 이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학생들이 검거되고 감옥에 들어가 고초를 겪은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과 학생들의 처벌로 11ㆍ3학생독립운동은 엄청난 희생을 치른 채 가라앉는 것 같았다.

그러나 1930년 1월 9일 광주고보 2학기 시험에 '백지동맹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11일 50명이 퇴학, 14일 244명에게 3일 동안 근신 처분, 15일 주동자 48명이 퇴학당했다. 광주여고보에서도 1930년 1월 10과 11일 이틀 동안 시험에서 백지동맹을 시도한 2명이 퇴학당했다.

당시 동아일보는 백지동맹 사건을 1930. 1. 17일자 '나주서 활동, 여학생 검거'라는 제하의 보도를 하였다.

"지난 13일 오전 열시경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 시험을 볼 때 돌연히 3년생 이광춘이가 교단에 뛰어올라 최후까지 백지답안을 계속하자고 연설을 하였다 함은 이미 아는 바어니와 지난 15일 오전 여섯시 반경에 나주군 나주면 대정정 63번지 이광춘의 집에 나주경찰서 정복경관 7∼8인이 와서 이광춘의 자매 광주여고보 3학년에 통학하는 이금자와 그 아우를 검거하는 동시에 엄중한 가택수색까지 하여 모종 격문도 압수하여 갔다는데 내용을 탐문한 즉 이광춘은 학교에서 백지답안을 최후까지 계속하자고 연설한 사건인 듯하다는 바 지금 유치하여 두고 취중이라 하며 이금자는 백지답안동맹에 가입한 혐의로 그와 같이 검거하여 동일 오전 11시 52분 나주역발 기차로 광주경찰서로 호송하였다"

1929년 11월 3일부터 시작된 11ㆍ3학생독립운동은 이듬해 3월까지 전국 320개교의 학생이 참여하는 거국적인 학생봉기로 이어졌다. 학생들은 시위와 동맹휴학 등으로 광주학생들의 봉기에 동조했으며 식민지 지배에 적극적으로 저항운동을 펼쳤다. 이 과정에서 전국적으로 무려 350명이 검거되어 260여 명이 구속되었다. 퇴학당한 학생들의 수는 알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투옥된 학생들은 옥중에서도 줄기차게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0년 3월 1일, 수감 학생들이 감방 벽을 두드리는 신호에 의해 일제히 '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를 외치는 소리로 감옥은 떠나갈 듯하였고 간수들은 혼비백산하였다. 그 후로는 더욱 철저한 감시와 학대 그리고 가혹한 고문이 뒤따랐다.

1930년 6월 하순경 감방 안의 이야기 소리가 복도까지 들렸다 하여 일본 간수가 대검으로 조선학생 얼굴을 찔러 상처를 낸 사건이 있었다. 전 수감 학생들은 고함을 지르며 규탄하고 3일 동안 계속해서 독립 만세를 부르며 농성하였다. 8월 하순 피부병 환자에 대한 치료를 요구한 학생들은 오히려 심하게 폭행을 당하였다. 일제의 만행이 광주학생운등 이후 극에 달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이러한 만행을 규탄·항의하였고 이로 인해 가혹한 형별을 받았다. 울분이 뼈에 사무친 학생들은 망국의 설움을 죽음으로써 이겨내자고 결심하고 단식 투쟁에 들어가 10일간 계속된 투쟁으로 수십 명의 학생들이 빈사 상태에 이르렀다. 그러나 벌방에 가두는 등 여전히 가혹 행위를 자행하였다.



민주화운동으로 정신계승



11ㆍ3학생독립운동은 3ㆍ1운동, 6ㆍ10만세운동과 함께 식민지시기 국내에서 전개된 3대 독립운동의 하나로 손꼽힌다. 특히 이 운동은 그 주역이 순수하게 학생들이었다는 점에서 3ㆍ1운동이나 6ㆍ10만세운동과는 또 다른 특징을 지닌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제의 식민지 노예교육에 대한 반발로서 1920년대 중반 이후 국내에서 광범위하게 전개된 항일학생운동의 결정판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즉 식민지 노예교육의 철폐, 조선인 본위의 교육의 실시를 주장하면서 1920년대 중반 이후 전개되어 온 각급 학교의 동맹휴학은 11ㆍ3 학생봉기로서 독립운동으로서 한 단계 더 승화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또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20년대 중반 이후 각급 학교에서 전개되어 온 학생들의 독서회, 사상연구회 등의 비밀결사 운동이 기반이 되어 일어났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회적·분산적 운동이 아닌 조직적ㆍ지속적인 운동으로서 전국적인 연계를 갖고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때 비밀결사 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은 1930년대 이후 각 방면에서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게 된다.

결국 1929년 11월 3일부터 1930년 봄까지 전개된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전국적이고 조직적인 학생독립운동으로서 1920년대 학생운동을 총 결산하는 운동이었다. 그리고 1930년대의 민족운동ㆍ사회운동을 준비하는 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1945년 8ㆍ15 해방과 함께 역사의 장으로 넘어갔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학생들은 1960년의 4ㆍ19, 1980년의 5ㆍ18, 1987년의 6월 항쟁 등을 통해 한국의 민주화를 이끈 주역이 되었다. 나주출신의 학생들도 이러한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그것은 광주학생독립운동에서 선배들이 보여준 항일 민족정신을 후배들도 계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은 그 발상지인 나주에 깊숙이 뿌리내려 미래의 희망찬 조국의 밑거름이 되고 있다.

기획취재반

김진혁 기자

이현영 기자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회의 지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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