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박굴재 사건 진실규명 결정

  • 입력 2011.12.19 21:58
  • 기자명 김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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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5년 5월 31일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이 제정ㆍ공포되고 12월 1일부터 업무가 시작되면서 우리 현대사의 아픔이 속속 드러났다.

대부분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사건과 위법부당한 공권력에 의한 사망 등 인권침해 사건, 국가적대세력에 의한 테러ㆍ폭력ㆍ학살사건 그리고 항일독립운동 및 해외동포사 내용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만큼 우리 현대사 질곡의 역사요 아픔을 간직한 채 아직도 진행형이란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의 공식 업무가 시작되면서 맨 처음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 사건 가운데 하나가 '나주 동박굴재사건'이다.

지난 2007년 4월 17일 제42차 전원위원회 회의에서 '나주 동박굴재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린 것은 진실화해위원회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사건, 항일독립운동, 해외동포사와 관련해 처음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진실규명 발표를 하면서 '나주 동박굴재사건'에 대해 국가는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사과하고 명예회복과 화해를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사건 관련 '나주 동박굴재 사건'에 대해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동박굴재 사건은 1951년 2월 26일 봉황면 철천리 철야마을 뒷산(속칭 동박굴재)에서 나주경찰서 소속 특공대에 의해 봉황면 송현리와 철천리 주민 등 약 40여 명이 불법적으로 희생되었다고 진실규명을 신청한 사건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 결과 나주경찰서 특공대가 '빨갱이'로 지목한 봉황면 송현리 원봉마을 주민 3명과 봉황면 선동마을 및 철야마을 주민 가운데 입산자 가족과 젊은 남자들, 가족의 연행에 항의하는 여성 등 29명을 철천리 뒷산(동박굴재)으로 끌고 가서 총살했는데 그 가운데 4명은 현장에서 달아나 생존했다고 밝혔다.

희생자들은 비무장, 비전투원인 민간인으로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으며 20∼30대가 가장 많았고 여성도 7명이 포함되었다고 설명했다.

또 당시 경찰이 주민분류 기준으로 처형대상자 '명단'을 사용했다는 증언을 통해 볼 때 이 사건은 계획적인 '입산자 가족 및 부역혐의자 임의처형(任意處刑)'이었다고 판단되나 경찰기록에는 작전 중에 사살된 '적'으로 기록되어 있어 민간인 희생의 실상이 은폐된 채 공비토벌 전과로 조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덧붙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사건의 직접 가해자는 봉황면에 파견된 나주경찰서 특공대 1개 소대로 확인되었고, 사건의 지휘ㆍ명령권은 나주경찰서장이 행사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나주경찰서장이 피해 주민들의 연행 및 총살 명령을 직접 내렸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경찰의 불법행위로 발생한 민간인희생의 최종적 책임은 국가에 귀속되며 전시 비상사태 하에서 법적절차가 지켜지기 어려웠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비무장 민간인들을 즉결 처형한 것은 명백히 위법행위라고 밝혔다.

진실화해위원회는 '동박굴재사건'의 진실이 규명됨에 따라 국가는 사건 희생자 및 관련 유족들에게 사과하고 법제도 정비, 역사기록 등재와 평화인권교육 강화, 위령사업의 지원, 호적정정 등 명예회복과 화해를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을 권고했다.



적대세력에 의한 민간인 학살사건



당시 진실화해위원회가 접수 조사한 나주지역 양민학살 사건은 봉황지역에서의 양민학살 사건을 비롯해 공산ㆍ남평ㆍ다도ㆍ다시ㆍ문평ㆍ왕곡면 등 6개 면에서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 세지 동창교 민간민 집단 희생사건, 다도면 민간인 희생사건 등이다.

진실화해위원회가 밝힌 공산ㆍ남평ㆍ다도ㆍ다시ㆍ문평ㆍ왕곡면 등 6개 면에서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사건은 1948년 11월부터 1951월 5월 총 111명이 희생당한 사건이다.

한국전쟁 발발 전인 1948년 11월부터 1949년 9월에 문평ㆍ다도ㆍ남평에서 5건이 발생하여 11명이 희생 및 상해를 당했고 인민군 점령기인 1950년 7월 말부터 1950년 9월 말에는 다도ㆍ왕곡면에서 3건이 발생하여 4명이 희생당했다. 인민군 퇴각기인 1950년 9월 말부터 1950년 10월 초에는 공산ㆍ왕곡면에서 2건이 발생하여 2명이 희생당했다. 인민군 퇴각 이후인 1950년 10월 초부터 1951년 5월에는 공산ㆍ다도ㆍ문평면에서 전체 희생자의 86%인 99명이 희생당하였다.

다도면에서 희생사건이 가장 많이 발생한 것은 다도면이 산악지역이고 주위의 영암ㆍ장흥ㆍ화순 등을 잇는 요충지여서 군경 토벌작전에 쫓긴 나주지역 빨치산들이 몰려들어 나주지역에서 가장 늦게 수복된 지역이라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 시기 미수복지역인 다도면에 남아 있는 군인, 경찰, 공직자, 우익단체원 등의 '우익 인사'나 그 가족이 빨치산에 의해 희생당하는 사건이 다수 발생한 것이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면장, 이장, 공무원, 군인, 경찰, 의용경찰, 대한청년단원, 우익단체원 등 '우익인사'나 그 가족이다. 또 빨치산 토벌작전이 벌어지면서 군인이나 경찰 정보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군·경에 협조한 이들이나 그 가족, 빨치산에 비협조적인 이들이나 그 가족이 희생당하기도 하였다.



세지 동창교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



세지 동창교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은 1951년 1월 20일 오봉리(동창마을)ㆍ벽산리(섬말마을) 주민 74명이 국군 제11사단 제20연대 제2대대 제5중대 군인들에 의해 불법적으로 집단 총살된 사건이다.

1951년 1월 20일 국군 제11사단 제20연대 제2대대 제5중대가 세지지서 경찰관, 세지면장, 구국총력연맹원, 지역유지 등을 동반하고 영산포에서 세지면으로 진주하던 중 노상의 행인 2명을 사살하고 주민 백형렬을 체포하였다. 뒤이어 5중대는 오봉리(동창마을)와 벽산리(섬말마을)로 진입하여 가가호호 수색하고 주민 200여 명을 동창교 아래 만봉천 개천가로 집결시킨 후 백형렬, 노점순과 그의 아기(당시 3세)를 총살한 다음 군ㆍ경 가족을 제외한 청ㆍ장년층 남자들만 가려내어 동창교 인근 신북여관 옆 밭으로 데려가서 전원 총살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결과 확인된 희생자는 모두 31명이지만 '나주시 세지면 동창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추진위원회'에 의해 파악된 별도의 희생자 명단까지 고려하면 희생규모는 최소 74명에서 최대 140여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희생자는 대부분 오봉리ㆍ벽산리 주민인 농민들이었고 일부는 영암군 금정면 등지에서 온 피난민들이었다. 희생자 전원이 비무장 민간인이었고, 노인ㆍ여성ㆍ어린이ㆍ유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의 발생장소는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치안상황이 불안정하고 빨치산의 출몰이 빈번했던 미 수복지구에 속해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5중대는 이 지역 주민들이 공비들에게 포섭되었거나 협조하고 있다는 의심을 하고 청ㆍ장년층 남자들을 가려내어 총살한 것으로 보인다.

세지 동창교 양민학살사건은 집단총살에 이르기까지 희생자들의 혐의에 관한 어떠한 확인 절차도 없었고 처벌에 관한 적법절차도 지켜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긴급한 작전상황이라 할지라도 아무런 확인과정이나 적법절차 없이 비무장 민간인을 임의로 집단총살한 것은 명백한 위법행위이고 국제법상으로는 전쟁범죄에 해당한다"며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의 유족들 또한 지금까지 크나큰 심리적 위축과 경제적 고통 및 사회적 불이익을 겪으며 살아온 것으로 확인"되었기에 국가는 사건 희생자 및 유족들에게 성의 있게 사과하고 명예회복을 위해 필요한 조치를 신속히 취할 것을 권고했다.



다도면 민간인 희생사건



다도 민간인 희생사건은 한국전쟁기인 1950년 7월부터 1951년 5월까지 다도면 주민 230여 명이 군경의 빨치산토벌작전 과정에서 '빨치산' 또는 '부역혐의자' 등으로 몰려 적법한 절차 없이 현장에서 사살되거나 군경에 연행된 후 사살ㆍ행방불명되었다.

또한 군경의 소개 명령에 따라 봉황면 등으로 피난한 주민 중 일부가 '부역혐의자'나 '입산자 가족'으로 몰려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희생자는 176명으로 이 가운데 희생사실이 확인된 사람이 133명이며 추정되는 사람이 43명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사건은 전시 계엄 하 수복작전 과정에서 발생하여 국민의 권리가 충분히 보호되기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법적 공백상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사건의 희생자들이 재판 등 적법한 절차를 밟았음을 확인해주는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고 밝히면서 "따라서 국가기관에 소속된 국군과 경찰이 적법절차 없이 비무장한 가족 단위의 민간인을 집단살해한 것은 인도주의에 반한 것이며 헌법에서 보장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을 침해하고 적법절차 원칙과 재판받을 권리를 침해한 불법행위"로 규정했다. 이 사건의 책임은 당시 군경을 관리·감독할 책임이 있었던 국가에까지 귀속된다는 것이 진실화해위위원회의 권고 이유다.

이 사건의 비극성은 어린이와 여성의 피해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 176명 중 20%(36명)가 여성이었고 10%(18명)가 12세 이하의 어린이였다. 사살현장에서 총격을 받고 살아난 생존자 중 7명이 12세 이하 어린이였다. 이는 군경이 어린이를 동반한 가족 단위의 피난민에게까지 무차별적인 총격을 가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것이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결과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진상규명 발표이후 보도자료를 통해 "국가는 그동안 마땅히 이행했어야 할 진실규명 의무를 이토록 늦추어 피해를 이중 삼중으로 증폭시켜온 책임이 큰 만큼 이제라도 피해자의 명예회복과 위령사업 그 밖의 마땅한 후속조치들을 최대한 서둘러서 피해 유족과 관련자들의 상처들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주어야 할 것이다"고 발표했다.



양민희생 사건 진상규명 그 후



다도 양민 희생자 유족들은 면사무소 주민자치센터 광장에 위령탑을 건립하고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위령비 오른쪽 측면에는 억울하게 희생된 혼령들을 위로하는 글과 왼쪽 측면에 374명의 희생자 명단을 마을별, 가족별, 한글자음 순으로 새겨 넣었다. 다시는 이러한 사건이 재발되지 않기를 바라고 올바른 역사의 재정립으로 제단에는 화합의 의미로 계수나무 안에서 서로 악수하는 상징물을 새겼다.

그동안 진상규명을 위해 발 벗고 나선 유족들은 다른 지역과 달리 좌익과 우익의 이념을 떠나 하나의 유족회를 구성해 운영하고 하면서 역사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노력을 다했다. 과거사 정리를 통해 현재의 화합과 진실을 통한 성숙된 역사의지로 질곡의 세월을 뛰어 넘겠다는 또 다른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다도의 합동위령제는 이념을 넘어 화해의 길을 앞장서 열어가는 선구적인 위령제로 통합의 미래를 여는 귀감으로 표현해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

유족들은 "민간인 피해가 유달리 컸던 만큼 상처도 깊었던 만큼 이제는 명예회복 속에서 해묵은 상처를 어루만지고 갈등의 깊은 골을 넘어야 할 시점이다"면서 "다시는 이 땅에서 6ㆍ25와 같은 동족상잔의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모두 화합하고 억울한 희생을 당하신 영령들도 편히 잠드셨으면 한다"고 말했다.



기획취재반

김진혁 기자

이현영 기자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회의 지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진실ㆍ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란?

2005년 5월 3일 대한민국 국회에서 통과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 기본법(속칭 과거사법)에 의해 2005년 12월 1일 출범한 위원회로 항일독립운동, 일제강점기 이후 국력을 신장시킨 해외동포사, 광복이후 반민주적 또는 반인권적 인권유린과 폭력 학살 의문사 사건 등을 조사하여 은폐된 진실을 밝혀 과거와의 화해를 통해 국민통합에 기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대한민국의 국가 기관이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인권위원회처럼 독립적인 국가 기관으로서 입법, 사법, 행정 3부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위원회다.

진실규명신청서는 2005년 12월 1일부터 2006년 11월 30일까지 접수되었으며, 2010년 2월 19일까지 처리대상 11,047건 중 8,541건(77.32%)이 처리 완료되었다. 또한 유해 및 유품 발굴을 3년간 진행하여 전국 13곳에서 한국전쟁 시기 민간인희생자들의 유해 1,617여구와 유품 6,020여점을 발굴하였다. 진실규명 사건 중 국가에 대해 총 200건의 권고를 하였고 이 중 이행완료 8건, 추진 중 115건, 계획수립 8건, 법원의 재심진행이 29건에 이른다. 하지만 2010년 6월30일 활동이 종료되고 그해 12월 31일로 해산되었다. 진실화해위는 해체되었지만 아직도 희생사건의 사회적 인정과 후속 조처는 모든 유족들의 염원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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