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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한 백두산, 하늘 아래 천지여
김준 기자  |  najuk2010@naju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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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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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탐방 사흘째, 6월 15일 아침 통화 통가강 호텔에서 눈을 떴다. 커튼을 젖히니 중국의 분주한 이른 아침 저자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곡류, 채소, 과일, 물고기 등 먹거리를 리어커에 올려놓고 팔고 사는 풍경에서 사람사는 맛이 풍겨난다. 널따란 마을광장에는 노인, 장년, 남녀가 한데 섞여 음악에 맞춰 중국식 체조에 열중하고 있다. 운동하는 품새가 유연하고도 리드미컬해 보였다.

일행을 태운 버스는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을 향해 줄기차게 달려갔다. 관광버스는 나선형으로 뚫린 관광도로를 지그재그로 느긋하게 올라간다. 백두산의 높이는 2744m이다. 백두산을 오르는 중에 인상 깊었던 수목군은 자작나무 숲이었다. 필자는 자작나무란 나무는 이름으로만 들었을 뿐, 처음 보는 나무였다. 아주 후리후리하게 생긴 나무인데 나무껍질이 순백색이었다. 자작나무는 북위 40도 정도의 위도에서 자라는 나무라고 한다. 자작나무의 용도는 다양하다. 고급목재용, 합판용, 또는 수피(樹皮)는 식용으로도 쓰인다는 것이다. 백두산 정상 가까이 오르자 나무는 거의 보이지 않고, 야생화 군락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관광버스에서 내리자, 천지를 향하여 오르는 돌계단과 나무계단을 병행하여 놓여있었다. 1330개의 돌계단 일부가 훼손되어 나무계단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천지의 주변에는 6월인데도 눈더미가 녹지 않고 초등학생 키만큼이나 쌓여 있었다.

천지는 그의 자태를 쉽게 보여주지 않았다. 어쩌면 새파란 하늘이 드문드문 보였다가, 금새 안개구름이 천지를 덮어 버렸다. 아니 어느새 천지는 서서히 그의 비경(秘境)을 드러내 주는 것이 아닌가! 장군봉, 백운봉, 천문봉, 청석봉, 옥설봉, 녹명봉, 낙타봉, 와호봉 등 16개의 봉우리에 둘러싸인 하늘아래 맑은 호수 천지는 참으로 신비하고 장엄하였다. 아! 하나님 감사합니다. 민족의 영산(靈山) 백두산의 정상인 천지를 볼 수 있다니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백두산 천지에서 흐르는 물은 세 개의 큰 강을 이룬다. 첫째, 압록강은 천지에서 발원하여 백두산 남파(南坡)를 거쳐, 신의주와 단동 사이를 통과하여, 장장 790km를 흘러 서해로 빠져나간다.

둘째, 토문강은 백두산 북파(北坡)를 거쳐 장백폭포의 장관을 이룬 후, 두만강으로 흐른다.

셋째, 송화강은 백두산 서파(西坡)를 거쳐 금강대협곡을 지나 길림을 지나 하얼빈을 지나 바다로 빠져나간다.

백두산은 고조선 이래 고구려, 발해 등이 백두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중국정부는 고구려와 발해 유적지 안내판마다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의 지방 통치기구였다'느니,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 북방의 소수민족’이라느니 하는 터무니없는 소리로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그 의도는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고, 주변국들은 모두 오랑캐라는 오만무례한 중화(中華)제국주의를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던가!

1677년(숙종 3년) 청나라 강희제(康熙帝)는 장백산, 즉 백두산을 그 조상의 발상지로서 관심을 갖고, 백두산 일대를 답사시켰다. 다음해 신하를 보내어 치제(致祭), 즉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백두산을 장백산신(長白山神)에 봉하고 백두산 일대의 출입과 거주를 제한하는 봉금정책을 썼다. 그러나 조선 사람들은 고구려의 옛 땅인 간도지방 만주벌판 무인지경에 이주하여 개척하였다. 1710년에는 함경도 위원(渭原)의 이만기(李萬技)가 국경을 넘어 삼을 캐는 중에 만주인 5명을 타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백두산을 귀속하려는 청에게 좋은 구실을 주었다. 2년 후인 1712년에 청은 오랄총관(烏喇摠管) 목극등(穆克登)을 파견해 국경을 확정케 한다. 목극등은 조선의 접반사인 박권(朴權)과 함경감사 이선부(李善傅)는 늙고 허약해 험한 길을 갈 수 없다며 무산에 가 있게 했다. 그리고 조선접반사군관, 차사관(差使官), 통관(通官) 등과 더불어 백두산의 꼭대기에 이르러 그해 5월 15일에 정계비를 세운 것이다. 조선의 접반사는 산정에 오르지도 못하고 목극등의 일방적 조처로 정계비가 세워졌다. 따라서 백두산 정상을 경계로 세우기로 했던 정계비를 백두산 정상에서 동남쪽으로 4㎞ 와서 압록강과 토문강의 두물이 강원(江源)에서 '人'자 모양으로 흐르는 곳의 바위를 비석의 귀부(龜趺)로 삼고 세웠다.

1881년(고종 18년) 청나라가 간도를 개척하려 하자, 1883년 조선은 어윤중(魚允中) 등으로 하여금 정계비(定界碑)를 조사케 한다. 정계비문 가운데 "서쪽은 압록으로, 동쪽은 토문으로"(西爲鴨綠東爲土門)를 근거로 해서 간도는 조선의 땅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청측은 토문을 두만강이라 왜곡하여, 간도일대를 청나라의 땅이라 했다. 이에 조선에서는 '두만강은 정계비에서 수십 리 밖의 지점에서 발원한 것이므로 비(碑)에 표시되기에는 너무 먼 강이다. 정계비 근처의 물 한줄기가 토문강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토문강이 확실하다'고 했다. 이러한 분쟁은 해결되지 않았다. 청일전쟁 후 일본이 남만주철도부설권을 얻는 대신 간도를 청에 넘겨버렸다. 우리는 이와같이 중국과 북한이 분할하여 관리하고 있는 역사적 배경과 진실을 확실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천지에서 내려오는 길에 동양의 그랜드캐넌으로 불리는 금강대협곡을 관망하였다. 산세로 보아 대륙의 험산준령다운 위용이 넘치고 있었다. 'V'자 협곡으로 흐르는 물은 중국 송화강으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아! 민족의 영봉 백두산은 우리 민족의 기상과 위용, 위대한 우리 겨레의 긍지를 일깨우는 장엄한 영산(靈山)이었다.(계속)



※ 8월 22일자 나주신문, 고구려 옛 땅 지안(집안)에 가다(3)의 동명왕릉은 장수왕릉의 오기(誤記)이오니 정정(訂正)합니다.



김병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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