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황토마을에서

일군 성공한 '가족농'

■ 개펄이 논으로 변한 황토마을

■ 평범한 회사원에서 농민으로

■ 가족농을 이루다

  • 입력 2011.12.20 11:02
  • 기자명 김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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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진군 고대면 당진포 1리 영전황토마을은 옛부터 황토로 이름난 곳이다.

도로가 포장되기 전에는 비만 오면 장화를 신고 다녀할 정도로 진흙탕으로 변해버린 황토 길을 걸어야 했고, 당진읍내에서는 신발만 봐도 영전마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황토가 좋은 이곳은 예로부터 고구마 농사를 많이 지었다. 속살이 노랗고 당도가 높은 영전 고구마는 대부분 서울 등지로 판매되었다.

넓은 갯벌이었던 마을 앞은 1984년 대호방조제가 완공되면서 간척지로 변했다. 평균 경작면적이 5.5ha(16,500평)나 될 정도로 많은 농토가 생겼다.

영전황토 마을은 집집마다 큰 창고가 있는데 이는 농기계와 벼, 고구마 등을 보관하기 위한 시설로 다른 마을에서 보기 드문 모습이다.

부자마을로 보이는 영전 황토마을 주민들도 우루과이라운드가 체결되면서 불어 닥친 농촌의 위기는 벗어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72가구, 인구는 208명으로 65세 이상이 60%를 차지하는 이곳은 다른 농촌과 달리 젊은 농군들이 많은 편이다.

고구마와 벼농사에만 전념했던 황토마을의 젊은이들은 대체작물을 찾았고, 92년도에 10명이 뜻을 모아 배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황토마을은 아직도 벼농사와 고구마가 가장 큰 소득원이지만 질 좋은 황토와 서해바다의 해풍을 맞고 자란 배는 육질이 아삭하고 당도가 높아 소비자들의 인기가 높다.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박정일씨는 군대를 제대하고 1년여 동안 서울에서 직장에 근무했다. 하지만 직장 생활보다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짓는 것이 더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고향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부모님이 갖고 계신 땅은 고작 1,100평에 불과했다. 스물 세 살의 청년이었던 박씨는 남의 논과 밭 7천여 평을 빌려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농사를 시작하면서 경운기를 구입한 박씨는 본인이 경작하는 논 7천 평 외에도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다른 사람의 논까지 약 5만여 평 이상을 논갈이 하는 등 그야말로 쉬지 않고 일했다. 일에 미친 사람처럼 무서울 정도였다.

경운기의 작업량보다 서너 배나 되는 트랙터로도 모내기를 위해 5만여 평의 논을 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는데 그 일을 경운기로 한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어찌 일에 미치지 않으면 할 수 있었을까.

84년 대호방조제가 완공되면서 넓은 간척지가 생겼지만 농지에 염분이 남아있어서 수년 동안 농사짓기가 어려웠다. 1년에 서너 번 모내기를 해서 염분을 빼 주어야 했기에 다행히 논은 다른 농지보다 싼 값에 구입할 수 있었다.

영전 황토마을 주민들이 가구당 평균 경작면적이 5.5ha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간척지가 생겼기 때문이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한 덕분에 박씨는 6.6ha의 논과 4.500평의 과수원을 갖게 되었다.

우루과이라운드가 체결되고 대체작물을 찾던 박씨는 마을 주민 9명과 함께 배나무를 심었다. 과수농업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질 좋은 황토에서 생산된 배는 다른 지역에서 생산되는 배보다 훨씬 아삭하고 당도도 높았다.

스물세 살에 결혼한 박정일씨는 2남 1녀를 두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이 중학교 3학년일 때 담임교사가 면담을 요청해 학교에 갔더니 둘째가 농업고등학교를 가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인문계 고등학교에 갈 성적이 되는데 앞으로 농사를 짓겠다며 농업고등학교에 진학하겠다고 하는데 아버지의 생각은 어떠냐고 물었다.

박씨는 "아들이 원하면 나도 찬성한다"며 농고 진학에 동의했다. 둘째 아들은 농고를 졸업한 뒤에는 농업전문대학에서 과수와 원예를 전공하였는데 이러한 과정이 박씨가 배나무를 심는 계기가 되었다.

3만여 평의 논농사와 4,500평의 배나무 과수원을 가꾸는 일은 아들 몫이 되었다. 그는 농사를 짓는 둘째 아들에게 논 6천여 평을 이전해 주었다. 따라서 6천여 평의 논농사에서 거두는 소득은 아들 몫이고, 박씨의 논농사와 과수원 일을 도와주는 대가로 연봉 2천만 원을 주고 있다.

영전황토마을에는 박씨의 경우처럼 가족농을 이루고 있는 가구가 여럿 있다. 논농사만 16만여 평을 짓는 사람도 있는데 역시 가족이 함께 농사를 짓는다.

가족농을 이루고 있는 사람들은 대규모 경작을 통해 일정한 소득을 올리고 있다. 또 자녀들 대부분 농업고등학교로 진학하거나 또는 농업전문학교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농업이 농한기를 이용하여 여가를 즐길 수도 있고, 농번기만 지나면 도시 노동자들에 비해 고된 노동(?)도 아니기 때문에 농업에 종사하게 된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마을 이장이 되다



박정일씨는 2000년 초에 규모화된 논농사를 지을 수 있을만한 땅을 장만하고, 과수원도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었다. 둘째 아들도 농사를 짓는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정도로 농사일에 익숙해졌다.

2003년 박씨를 포함한 16농가가 참여하는 팜스테이마을로 지정되고, 2004년에는 정보화마을로 지정되는 등 마을에 변화가 오기 시작하면서 누군가 마을에서 추진하는 사업들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희생해야 할 사람이 필요했다.

어느 정도 생활에 안정을 이루었다고 생각한 박씨는 2005년에 마을 이장을 맡았고, 그 해 영전황토마을은 녹색농촌체험마을로 지정받아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로부터 체험 기반시설을 만들 수 있는 지원을 받았다.

팜스테이를 시작하면서 황토마을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벼농사에 저농약 재배를 시작으로 과수에는 거의 농약을 사용하지 않는 친환경 농업으로 바뀌었다.

마을 입구에서 마을까지 500여 미터나 되는 길가에는 칸나를 심어 마을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밝고 기쁜 마음을 갖게 만든다.

황토마을에는 유난히 큰 창고들이 많이 있다. 박정일 위원장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수백만 원에서 수천만 원하는 농기계를 함부로 방치하는 것을 많이 보았다. 나는 93년도에 구입한 트랙터를 지금도 사용하고 있고, 콤바인은 12년 째 사용하고 있다. 콤바인으로 한 해에 5만평 가량의 벼를 베고 있지만 멀쩡하다”고 했다.

박 위원장이 이렇게 농기계를 오래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농기계를 소중히 다루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창고를 지어 농기계가 비 맞지 않도록 하고, 사용한 농기계는 반드시 청소를 해주고, 농한기 때는 기름칠을 해서 녹슬지 않게 했다는 것이다.

이를 본 마을 주민들도 이제는 대부분 농기계 창고를 짓고, 농기계를 보관한다. 주민들의 의식을 바꾸어놓은 것이다.



농산물을 공판장에 내다 팔지 않는다



황토마을에 주요 재배 작물인 고구마는 연간 15.000박스, 배는 6.000박스를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고구마나 배를 공판장이나 시장에서 판매하지 않는다.

마을을 방문하는 체험객과 마을을 다녀간 도시민 그리고 마을과 자매결연을 한 회사에서 대부분 구매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2007년에 3.000여명이었던 방문객은 2008년에 8.000여 명이나 되었다. 태안반도에 기름유출 사건과 구제역 파동으로 지난 2년 동안 방문객이 2.000여명 정도 줄어들었지만 농산물 직거래는 늘어나고 있다.

현재 12개 공기업과 회사와 자매결연으로 고구마 캐기, 향토음식 체험, 짚풀공예 체험, 황토염색 체험 등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이런 체험활동은 대부분 박정일 위원장과 사무장 그리고 마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이루어지고 있고, 체험객들을 위한 6.000여 평의 마을 광장도 화장실과 수도 등 편의시설이 곧 완공 될 예정이다.





인터뷰



품질 좋은 농산물로 소비자와 직거래



▲ 황토마을은 여러 가구가 한 곳에 모여 사는 형태의 동네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집이 한두 채 씩 지어져 있어서 서로 소통하고 단합하는데 어려움은 없습니까?



박정일 : 마을회관에 모여 서로 토론하고 대화하는 시간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오히려 팜스테이를 하는데 집이 한 곳에 모여 있지 않아 좋은 점도 있습니다. 경관도 다르고, 여러 가족이 와서 놀더라도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으니까요.



▲ 체험객의 방문이나 팜스테이로 주민소득에는 얼마나 도움이 되고 있습니까?



박정일 : 우리 마을은 다른 농촌과 달리 농업소득이 많은 편입니다. 체험객의 방문이나 팜스테이가 주민소득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지만 농산물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 생산자와 소비자의 직거래를 통한 유통마진을 빼는 등 2차적인 효과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 주민들에게 실질적인 소득이 없는 체험객 방문에 대해 주민들이 귀찮게 여기거나 이런 사업을 반대하지는 않았습니까?



박정일 : 주민들이 체험마을 선진지 견학이나 여러 가지 교육을 받으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혼자만 살 수 없는 것이고, 농촌이 부강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 도시와 농촌의 교류는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도시민들이 마을을 방문하면서 마을도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예를 꽃길 가꾸기 등도 그렇습니다.



▲ 많은 농사를 지으면서 언제까지 마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실 생각인가요?



박정일 : 아들이 농사일을 많이 도와주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는 나은 편입니다. 1.100평으로 시작한 농사꾼이 3남매 모두 대학 졸업하고 결혼까지 했으니까 더 이상 욕심 낼 것도 없고요. 저 혼자 잘산다고 행복할 수는 없잖아요? 이웃과 더불어 잘 살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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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마을공동체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실천한 사람들이 새로운 희망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역사회에 대한 꿈의 실천으로 삶의 근본을 이루고 있는 마을에서 공동체성과 공공성을 잘 구현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았다. 모두가 농촌은 힘들다는 인식을 하고 있는 가운데 척박한 곳에서 희망을 실천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우리 지역사회를 변화시키는 작은 원동력이 되었으면 한다. 함께 농사짓고 서로 돕는 우리의 전통양식을 새롭게 접목하면서 시작한 공동체의 삶에서 주민들이 스스로 조직하여 참여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전파해나가는 과정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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