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하산 김철 선생 추모식

■ 의로운 나주인 김철 선생의 삶

나주출신으로 광주 3ㆍ1운동 주도

친일청산과 민족통일에 일생 바쳐

  • 입력 2012.03.05 15:06
  • 기자명 이현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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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주년 삼일절 지역 출신으로 항일운동과 독립운동의 대표적인 인물인 하산 김철 선생에 대한 추모식이 지난 1일 선생의 묘역에서 엄숙하게 치러졌다.

열 두 번째를 맞는 이번 추모식은 광주YMCA의 주최로 유가족과 고성혁 나주부시장과 최영관 광주YMCA 증경이사장을 비롯해 민주노총나주지부, 나주시공무원노조, 나주사랑시민회, 참교육학부모 나주지회, 문화원과 청소년수련관과 다수시민 100여 명이 참석했다.

추모식은 유가족 인사, 삼일절 노래제창, 만세삼창, 헌화분향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최영관 광주YMCA 증경이사장은 추모사를 통해 "90년 전 광주YMCA 초대 총무를 맡았던 김철 선생를 찾게 된 인연으로 4년 전 참가하게 됐고 이와 더불어 이번 행사를 열게 되어 감회가 새롭다"며 "민족통일에 평생을 바친 하산 김철 선생의 투철한 나라사랑 정신과 뜻을 기리고 본받자"라고 말했다.

김철 선생 추모식은 지난 1999년 나주사랑청년회(현 나주사랑시민회)가 작년까지 북초등학교에서 '회원의 날' 행사를 갖고 유가족과 함께 처음으로 참배하면서 독립운동의 정신을 되새기기 위해 매년 추모식을 거행했다.

한편 이제까지 민간단체에서 주관해 추모식을 거행하고 있지만 나주시가 역사 인물선양사업의 일환으로 '하산 김철 선생 기념사업'을 규모 있게 추진하는 것이 지역청소년에게는 역사의식과 고향사랑을 고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일반 무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선생의 묘소를 소공원화 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최소한 일반인이 쉽게 찾아올 수 있는 안내판 설치도 시급한 실정이다.

김철 선생의 본명은 복현이다. 1890년 10월 7일 나주단발령 의거를 주도했던 김창곤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단발령 의거가 실패해 김창곤이 처형당한 후 어려운 유년기를 보냈다. 1919년 교회활동을 통해 항일운동을 모색하며 광주ㆍ전남 삼일운동 책임자로 추대돼 광주 삼일운동을 주도했으며 전남 각지로 시위를 확산시켰다.

삼일운동으로 체포돼 재판에 섰을 때 "이 운동의 주도자는 나다. 내 지시에 따라 행동한 학생들은 그냥 돌려보내라. 내 이름은 김철(金鐵)이다. 쇠는 불에 달구고 두들길수록 더욱 단단해진다"고 주장했는데 이때부터 철(鐵)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 나중에는 다시 철(哲)자로 바꿨다. 해방을 맞이한 그는 전남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추대됐고 건준이 해체된 후 인민위원회에서도 부위원장 직을 맡았다. 1946년에는 신민당의 전남지부 위원장으로 활동하는 한편 조선인민당에서도 활동했다.

미군정 때 다시 옥고를 치르고 분파투쟁에서 소외되면서 이선으로 물러나 친일세력의 재등장과 남북분단, 정치부패, 동족상잔의 전쟁을 목격하면서 그저 한숨으로 밤낮을보냈다. 1960년 4ㆍ19혁명 이후 사회대중당 전남도당을 결성했고 이후 사회대중당에서 분리된 사회당 고문을 맡아 민주주의의 완성과 조국통일을 위한 마지막 투쟁을 전개했다. 그러나 이 역시 5ㆍ16쿠데타로 짓밟혀 버렸고 민주주의와 통일의 비원을 가슴에 묻은 채 1969년 가족의 품에서 세상을 떠났다.

■ 이현영 기자

midon200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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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사회단체 대표자들이 나주북초등학교 뒤편 하산 김철 선생 묘소에서 참배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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