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매기에는

  • 입력 2013.05.13 14:01
  • 기자명 양성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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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3시경 연초록의 녹음이 우거진 느티나무 가로수가 계절의 여왕 5월을 찬양하듯 싱싱한 사매기길을 걷는다.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금성관(객사)주위에 들어선 곰탕집들은 장사진을 이룬다. 양지와 사태를 푹 끓여 구수하고 담백함 고기국물 곰탕은 주머니 사정 걱정없이 누구나 부담없이 먹을 수 있는 온 국민의 사랑을 받는 음식이다.


식당에서 나온 사람들의 표정은 시장기를 벗은 듯 삼삼오오 그늘진 정수루에 모이고 이층의 누각에 메달린 북의 용도 무엇일까? 궁금해하는 눈치다. 여유있는 느긋한 표정과 자세로 역사의 깊이 만큼이나 깊이 패인 기둥하나 하나 높다란 주초석의 정자국의 고졸한 멋을 즐긴다. 이들이 썰물처럼 빠져 나간 거리는 한산하다. 나는 무료해진다.
관광안내소에 찾아오는 이가 뜸해지는 오후 2~3시경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잠깐 졸음을 쫒을까 해서 사매기, 왕이 지났던 길로 접어든다.


1872년 나주고지도를 보면 금성산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다보사 골짜기의 물과 오두재 골짜기의 물이 합쳐져서 성안으로 흘러와 한줄기는 나주천으로 또다른 한줄기는 나주향교앞을 지나 금성관 뒤쪽으로 구 나주5일시장터에 있는 인덕지로 들어갔다. 이곳 사매기는 1611년 고려현종이 거란의 침입으로 수도 개경을 떠나 남으로 몽진하던중 나주에서 10여일동안 머물다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농지개량조합 부근에 있던 다리를 지나갔는데 이후 이 다리를 사마교라 했던 것을 세월이 흘러 사람들은 사매기라 부른다.


의지할 곳 없던 임금, 따르는 신하들조차 어가행렬에서 이탈하고 임금이 지나가는 고을의 관리는 무시와 협박을 했다. 하지만 고려정부의 든든한 버팀목이요 임금의 고향인 나주는 거란이 물러가길 임금과 함게 염원하지 않았을까!
이후 개경으로 환도한 군주는 나주를 잊지 않았다. 길이 갈림길이다 왼편으로 멀리 영금문이 보이고 오른쪽은 금성관이 보인다. 앞쪽은 꽤나 널찍한 공터가 보이고.... 금성관 뒤쪽은 옛날 곡식창고가 있던 사창거리인데 수령 400년 느티나무는 마을어르신들의 휴식장소가 되었다.


공터는 옛 향청자리이자 농지개량조합자리였다. 향청은 외지출신인 수령이 고을 사정을 속속들이 알기 어렵기 때문에 학식과 경제력을 가진 양반중에 죄수와 별감이 되어 현실정치의 동반자로 인정하면서 수령을 보좌하게 했던 관청이다.
“못내못내 절대못내 부당수세 절대못내”를 목이 터져라 외쳤던 농민들의 피끓는 함성이 발걸음을 세운다.
나주농민들의 투쟁과 농민운동 못지않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는 모습을 광풍으로 표현한 나주농민 수세거부 운동비에서 현대사의 질곡을 더듬는다.


1만5천 농민대중들이 “삼천만 잠들었을때 우리는 깨어”라는 노래가 흘러나오고 이후 전국적인 조직 전농이 결성되기도 했지만 우루과이라운드 한미 FTA이니 아직도 농민들은 어깨를 짖누루는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있다.
짧은시간이었지만 나주도심의 낮은 집들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진 오래된 도시의 골목길이 궁금해진다.
역사의 두께만큼이나 나주사람들의 삶의 기억 한 부분을 이루는 예전의 골목들,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폭이 좁아 남녀가 부딪치기만 해도 자연스레 연애가 이루어진다는 연애고샅, 징그럽게 길어서 징고샅, 장사의 들독길, 보리마당등 지금은 예전의 골목은 아니어도 지나간 추억의 한자리를 차지하는 우리들에겐 너무도 소중한 길들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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