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마르코폴로 ‘최부’를 아시나요

금남 최부선생 기념사업회 20일 나주에서 출범

  • 입력 2013.07.22 13:27
  • 기자명 박학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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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성종 재위 19년째인 1488년 윤 1월3일, 제주(濟州) 삼읍(三邑)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이라는 지방관으로 있던 최부(崔簿.1454-1504)는 부친상을 치르기 위해 고향 나주를 향해 제주를 떠났다.

일행은 최부를 포함해 모두 43명. 출항 때 날씨에 대해 최부는 “잠깐 흐리고 비가 왔다. 동풍이 조금 불고 바닷빛은 매우 푸르렀다”고 증언하고 있다. 하지만 몇몇 현지인은 “늙은 종이 섬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수로를 잘 아는데 한라산이 흐리거나 비가 와서 일기가 고르지 못하면 반드시 사람의 변고가 있으니 배를 타서는 안됩니다”라며 최부에게 출항을 미룰 것을 종용했다.

이런 불길한 예언은 그대로 적중했다. 출항 이틀째, “우박과 대풍이 불고 사나운 파도와 풍랑이 일어” 최부 일행은 뱃길을 잃고 대양을 표류하는 신세가 된다.
최부가 무리하게 출항한 것은 그 자신에게는 갖은 고초를 가져다주었으나, 그것은 역설적으로 「표해록」(漂海錄)이라는 표류기의 금자탑을 낳았다.

표류 14일째인 그달 16일, 최부 일행은 중국 저장성(浙江省) 해변에 상륙했다. 그러나 최부 일행에게는 또 다른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중국은 왜구의 잦은 출몰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최부 일행은 왜구로 간주됐다.

관청으로 압송돼 가는 길에 어떤 마을 다리를 지나다가 그곳 사람들에게 몽둥이로 흠씬 두들겨맞기까지 했다. 「표해록」 윤 1월18일 대목에는 “몽둥이로 우리를 마구 때리면서 횡포를 부렸고 겁탈이 매우 심했다”고 증언한다. 얼마나 왜구들에게 시달렸으면 중국인들이 그렇게 행동했을까?

그러나 이후 최부 일행의 행로는 고되기는 했으나, 비교적 순탄했다. 왜구라는 혐의를 벗고서는 군리(軍吏)의 인도를 받으며 항저우(杭州)를 출발해 운하를 따라 북상, 베이징(北京)에 이른다. 명나라 황제를 배알하고는 요동반도를 따라 육로를 이용, 제주를 떠난 지 6개월만인 그해 6월18일 청파역을 통해 서울로 들어가 성종을 뵈었다. 최부 일행이 중국에 체류한 135일 동안 다닌 거리는 무려 8천80리.

최부는 성종의 명으로 표류 및 중국여행에서 겪고 들은 일을 책 3권으로 지어 바치니 이것이 처음에는 「중조문견일기」(中朝聞見日記)라고 했던 「표해록」이다. 이 기행문은 해양신앙의 실태를 필두로, 중국 명나라의 해안방비 상황과 지리, 민속, 언어, 문화, 조선-명 관계 등에 대한 귀중한 증언집이다.

학계 일각에서는 이 「표해록」을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9세기 일본 승려 옌닌(圓仁)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와 더불어 외국인에 의한 3대 중국 기행문으로 꼽히기도 한다.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동방견문록」은 알아도 「표해록」은 모르고, 「최부」란 이름은 영 낯설기만 하다. 우리가 버린 15세기 조선 표류 혹은 중국 기행문학의 금자탑인 「표해록」의 저자 금남 최부 선생을 선양하자는 뜻이 하나 둘 모아져 드디어 기념사업회가 창립의 닻을 올렸다.


금남 최부선생 기념사업회(추진위원장 최남희, 준비위원장 이영기)는 20일 오전 나주신용협동조합 대강당에서 탐진 최씨와 최부의 외손(外孫)인 나주(羅州) 나씨 문중, 한중문화교류회 회원, 지역주민 등이 참석한 가운데 창립총회를 갖고 본격적인 활동에 나서기로 했다.

기념사업회 관계자는 “기념사업회 창립을 계기로 한국과 중국의 우호교류 확대는 물론 최 부 선생을 안팎으로 알릴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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