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평천의 갈대소리

  • 입력 2013.10.28 08:58
  • 기자명 양성숙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몇해전 조선 선비의 나날을 적은 책을 읽다가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와 책을 덮고 그 구절의 장면을 머릿속에

그려봤다.
정조 때 학자이자 시인이었던 박제가선생이 영변도호부사로 발령 난 장인을 따라 영변에 머무를 때 서울에 있는 친구 이덕무와 유득공이 묘향산 단풍을 보고 빨리 돌아오라는 편지를 보냈다.


관서지방 제일의 명소 묘향산을 둘러보고 쓴 아름다운 기행문 묘향산소기(妙香山小記)에서 가을이 되면 그 글 중 유독 몇 구절이 생각 난다.
패기만만하고 감수성 예민한 스무 살 청년의 당황해 하며 아닌 척 하는 모습에 책읽는 재미가 있었다.
『(생략)뾰족한 돌이 낙엽을 뒤집어쓰고 있다가 발을 딛자 삐어져 나온다.


미끄러져 자빠질 뻔하다 일어났다. 손으로 진흙을 짚었는데 뒤따라오는 사람들의 비웃음이 될까 부끄러워 얼른 붉은 단풍잎 하나 주워 들고 그들을 기다렸다. (생략)』 나머지 전문은 통일된 조국의 산하를 보는 그날을 위해 독자들이 찿아서 읽어보길...


10월 가을의 막바지에서 국토가 들썩들썩하다.
봄에는 꽃구경을 여름에는 산과 바다로 가을에는 단풍구경을 겨울에는 눈꽃구경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네 생활이 함께하지 못하면 방외인 같은 모습이 슬픈 현실이다.


아직 가을여행을 떠나지 못한 독자들을 위해 너무 일상적인 풍경이어서 특별할 것 없는 나주의 소소한 가을 속으로 떠나보자.
언젠가 외지에서 오신분이 순천만 갈대 부럽지 않겠다며 칭찬했던 곳이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더니 이후에 그곳은 소중한 풍경으로 다가왔다.


다시면 복암리뜰을 가르며 흐르는 문평천 주위를 느릿한 황소걸음으로 걸어보자. 문평면 학교리에서 다시면 죽산리 터진목까지 흐르는 문평천은 다시의 초동, 가흥리, 정가, 신흥마을앞을 지나가는 구간의 갈대는 밀도 높은 보드라운 장관을 연출한다.


영산강살리기로 인해 본류의 억새와 갈대는 사라졌지만 샛강의 갈대는 파란하늘과 주위 황금들판이 조화를 이룬다.
조그마한 샛강이 몸을 풀어 놓은 들판 가운데 무덤의 박물관, 아파트형 고분이라 불리는 복암리고분과 나주의 무형의 자산을 이어가는 쪽 재배 단지의 연보라빛 색감의 꽃은 미스테리한 신비를 간직한 무덤과 환상의 궁합을 이룬다.


잠애산 자락 랑동마을은 2014년 개관이 목표인 복암리 전시관의 공사로 분주하고, 마을 안쪽에 있는 수많은 고인돌에서는 3천년전 고대인의 삶과 세계도 들여다볼 수 있다.
문평천의 강태공들은 어느 세월을 낚는지 주위는 고요하고, 다리를 건너니 최근 뉴스에 나온 가흥리 신흥고분이 발굴조사로 바쁘다.


영산강유역의 전방후원형 고분 중 가장 아른 시기의 무덤이라 추정하는 무덤이다. 원형의 봉분 전면에 사각형의 단을 설치한 고분양식인데 일본 열도에서는 흔한 것이다.
영산강 유역에서는 13기가 확인 되었는데 축조 시기는 6C초로 평가된다. 그런데 신흥고분은 50년 정도 빠른 5C중엽의 무덤으로 확인된다고 조사단이 발표했다. 조그마한 땅덩이 자체가 매장문화재 지뢰밭이다.


농로 끝자락 정가마을의 도로변에서 보약이 되는 가을볕에 나락을 말리고 있다. 운전하시는 분은 아는지 모르겠지만 보리는 밟고 가도 큰 피해는 없지만 나락은 으깨져서는 안되니 조심 운전해야 한다.
이건 농자천하지대본 국민의 자세가 아닐지...


오래된 마을의 고샅길을 걷는 즐거움은 뭘까? 붉게 영글어가는 감, 떨어진 노오란 은행잎을 밟으면 느껴지는 푹신한 느낌과 한창 가을로 치장한 그 속으로 들어가 어린시절의 추억과 살아온 내력들이 숨김없이 고요하게 그려지는 자연스러움일 것이다.
강과 들판과 역사가 깊은 마을이 있는 그곳에는 나주의 색깔을 갖춘 평범한 가을 여행으로 적소일 것이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