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6.25 한국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 입력 2014.06.30 11:22
  • 수정 2014.06.30 11:32
  • 기자명 이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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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에서 6.25 한국전쟁이 끝난 전쟁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남침 또는 북침 등을 이야기 하여 북한을 찬양하거나 동조하려는 세력이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라 생각해본다.
먼저 6.25를 말하기 전에 생각나는 것은 식민지 조선의 마지막 총독 ‘아베 노부유키“ 현재 일본총리의 할아버지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는 물러나면서 일본은 패했지만 조선은 승리 한 것이 아니라고 했으며. 장담 하건데 조선인이 제정신을 차리고 찬란하고 위대했던 옛 조선을 되찾으려면 100년이라는 세월이 훨씬 더 걸릴 것이다. 우리 일본은 조선민에게 총과 대포보다 더 무서운 식민교육을 심어 놓았다. 결국은 서로 이간질하며 노예적 삶을 살 것이다.

실로 조선은 위대했고 찬란했지만 현재 조선은 결국 식민교육의 노예로 전락 할 것이다.
나는 이 말을 생각 할 대마다 등이 오싹 해진다.
왜냐하면 국가의 이익을 우선하기 보다는 인기위주의 정책. 흔이 말하는 관피아. 도덕이라는 교과서가 없는 교육. 도덕교육 속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지켜야하는 인륜 도덕이 있었으며 어른을 공경하고 부모에게 효도해야하는 기본교육이 있었는데 지금의 교육은 안타깝기만 하다. 그리고 우리는 조국근대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루어냈는데 민주화라는 민주주의는 먼저 자기의무를 다하고 권리를 주장해야 되는데 일부에서는 권리를 먼저 주장하는 이러한 과정들을 보면서 그리이스의 위기가 우리에게 머지않아 닥치지 않을까 걱정이 되며 내가 다니던 학교시절 당파싸움과 양반들의 행패에 발전되지 못한 조선을 배웠는데 지금 여.야.의 모습이 그 시절의 당파 싸움이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6.25한국전쟁은 소련의 스탈린이 냉전체제의 구축을 위하여 중국을 끌어들여 미국과의 적대국을 만들어 중국을 공산 진영에 머무르도록 하여 대미 전략에서 우위에 서려는 전략 속에서 김일성이의 남조선 적화통일 야욕을 이용한 것이며 한국전쟁은 김일성이가 남조선을 적화통일을 이루면 않되는 전략적 전쟁 이였다. 그것은 김일성이 빨리 통일을 성공 해버리면 중공군의 개입 명분이 없기 때문이며 미국과 중국이 적대국이 되게하는 전략에 차질이 생기기 때문이다. 김일성이 서울을 점령하고 3일간을 기다린것은 소련에서 약속한 전쟁물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김일성이 그렇게 빨리 서울을 점령할지 몰랐으며 남한을 적화통일이 이루어 지면 않되기 때문에 전쟁물자를 더 이상 주지않았다.
(김일성은 회고록에 스탈린은 조국통일을 방해하고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 나쁜 사람이다. 내가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었는데 하고 가슴 치며 통탄하는 것이 바로 서울점령 3일이다. 그때 우리가 서울에서 3일 동안 쉬지 않고 그 기세로 쭉 밀고 나갔다면 미국 놈들의 생각도 바꿔 놓을 수 있었다. 그런데 소련에서 주겠다던 무기를 주지를 않았다. 그때 가진 것으로 밑에까지 쭉 밀고 내려가기에는 도무지 타산이 맞지 않았다. 소련 놈들은 서울이 그렇게 빨리 점령당할지 몰랐다고 후에 변명을 했다.)

인천상륙 작전이후 서울을 수복하고 평양을 거처 압록강 까지 진격한 유엔군과 국군은 통일을 이루는 희망에 부풀었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1.4 후퇴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으며 국군과 유엔군의 싸움은 북괘군이 아닌 중공군과의 싸움이 되어버린 것이다.
지금 살아계시는 6.25 전쟁에 참여하여 무공훈장을 수상하신 회원님 들은 북괘군과의 전투보다 인민군과의 전투를 더 많이 하였다고 하시는 것은 스탈린의 각본대로 진행 되어진 것이다.
중공군이 압록강을 건넌1950.10.19일에 유엔군은 평양을 점령했고 팽덕회 는 신의주를 포기할 생각까지 하였다.
 
 
팽덕회 는 북부일부 산악지대에 중공군의 통로를 확보 하는 것조차 보증하기 어렵다고 모택동에게 보고한다.
이 보고서를 받은 모택동은 맥아더 장군 못지않은 군사적 천재성을 지닌 것으로 나타난다. 유엔군이 남부군과 서부군의 80키로 V자형의 공간을 이용 하려고 하였다 . 이 틈새에서 대 우회 전략을 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여기서 모택동은 수세적 방어전을 기동적 개념으로 바꾸어 전기를 살려 적을 먼저 공격한 다음 전쟁의 주도권을 잡은 뒤 상황을 봐 가면서 공세를 준비 하려고 하였다.

중공군과 한국군의 미군 사이에 최초 교전은 10.25일 에 있었다.
그 전날 맥아더는 유엔군에 총공세 명령을 내린다. 이때 백선엽 장군이 지휘하는 1사단과 미 기병 1사단이 청천강을 건너 운산까지 진출 했을때 중공군의 역공을 당했다.
중공군은 주로 한국군을 겨냥 했는데 한국군 1. 6, 8사단이 큰 타격을 입었고 6사단은 10.26일 압록강 초산에 도달해 강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낸 직후 중공군의 공세에 밀려 물러나야 했다.
11.06일까지 계속되는 중공군의 1차공세로 유엔군의 북진에 제동이 걸렸다. 서부전선에서는 유엔군이 청천강 남쪽으로 물러났으며 중공군은 그 뒤로 산악지대에 숨어 버렸다. 그렇게 시작된 중공군의 적극적 공세에 국군과 유엔군은 1.4후퇴가 시작 되었다.

중공의 모택동은 왜 한국전에 참전 하였을까?
1950년 초 세계의 세력판도가 급변하고 있었다. 그것은1949년9월에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여 미국의 핵 독점 시대를 끝냈기 때문이며 1948년에 모택동이 중국의 장개석 민주정부를 몰아내는 내란을 하여 중공의 공산 통일에 성공하게 되는데 스탈린과 김일성의 함정에 빠져 서방세계로부터 고립 되였지만 중공의 모택동은 비정한 계산이 있었다. 중국 내전 때 투항한 장개석군대 출신들을 한국으로 많이 출병시켜 소모시키고 그 대가로 소련으로부터 무기 및 재조 기술을 지원받아 중공군을 세계적 강군으로 만들고 싶어 했던 것이다.

중국이 미국과 손을 잡는 것은 한국전 참전 20년 뒤이고 본격적으로 개혁. 개방에 착수하는 건 30년 뒤이다. 모택동은 스탈린과 김일성 때문에 30년을 잃어버린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중공군이 개입하지 않으면 한반도기 통일을 이룩하여 좋은 것이며 중공군이 개입 하면은 확전의 기회로 삼아 장례에 아시아의 위협이 될 중공의 모택동 공산정권을 물리치고 중국의 내전에 도움을 주었든 장개석 민주정부를 내새워 중국을 통치하게 만드는 원대한 전략이 있었으나 트루먼 대통령의 반대에 무산이 되고 만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군사적으로 열악한 현실 속에서 북한이 침략을 도발 하여 위기의 순간에서 유엔군의 참전으로 북진통일 이라는 희망이 보이게 되자 맥아더 장군에게 중공군은 반드시 한국전쟁에 개입을 할 것이지만 태평양의 외이크 섬에서 트루먼 대통령과 만나 더라도 중공군 개입 가능성을 긍정하지 말도록 부탁을 합니다. 그리고 맥아더에게 귀하의 현명한 지도가 아니고서는 한반도의 통일의 열망을 달성하기가 불가능 하다고 이야기 하면서 이 간절한 심정을 살펴주시기를 바랍니다.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6.25의 내부적 요인은 더욱 우리를 놀라게 하고 있습니다.

1949년 말에 육군본부 정보국에서는 종합적인 북괴군 동향 보고서를 작성하여 채병덕 육군 참모총장과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이북 북괴군의 움직임과 적군의 침략가능성 및 위기를 예측하여 보고를 하였으나 신성모 국방장관 선에서 더 이상 보고가 되지를 않았다고 합니다.(김종필 자민당총재였으며 국무총리 였든 김종필 총재는 당시 육군 정보국에 근무 중에 있었으며 1950년 6월24일 밤에 자기가 근무 시간이 아니지만 자기가 야간 상황근무를 하겠다고 자원하였다.
그 당시 육군본부 정보국에 근무하면서 상황파악을 하고 24일 밤에 상황실근무를 자청하여 근무하시면서 전방의 각 부대에 매 시간마다 북괴군 동향을 보고하라는 지시를 하여 보고받아 군군 수뇌부에 보고를 하셨든 감총필 전 국무총리가 2012년에 발표한 것입니다.
당시 신성모 국방장광은 민간 상선의 선장 출신이였고 채병덕 참모총장은 병기장교 출싱이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기용함으로서 북괴군 남침에 대한 대처를 제대로 작용하지 못하였다. 라고 발표를 하셨습니다.
6.25 한국전쟁은 우리의 뜻에 따라 이루어 진것이 아니라 김일성의 적화통일 야욕을 이용한 강대국들의 전쟁터를 재공 하는 쓰라린 우리의 아픔의 상처이며 이 상처는 아작도 아물지 않았으며 일본 식민지의 쓰라린 고통을 안고 있는 우리조국 이재는 튼튼한 안보를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쓰라린 과거를 거울삼아 후세에 교육 하여야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전쟁을 잊고 살고 있다.
외국에서는 전쟁을 잊지 않으려고 행진까지 하고 있다.

우리는 잊혀진 전쟁을 기억 하여야 한다.그리고 그것을 후세에게 교육을 하여 우리의 가슴 아픈 전쟁을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그리고 우리는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닌데 마치 전쟁이 끝나 버린 것 같은 착각을 하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전쟁이 끝나버린 상태가 아니고 김일성의 요구에 의하여 전쟁을 잠시 쉬고 있는 휴전상태 인 것을 반드시 명심 하여야 하는것이며 6.25이후 우리가 이렇게 안심하고 편안하게 살아가는 것은 한.미 동맹이라는 보호 속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6.25 전쟁을 교훈으로 삼아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학생들에게 가르켜야 할 것이다 후손들에게 역사적 진실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다.
미국 남북전쟁의 워털루 전투의 승리자였던 웰링턴장군은 워털루전투의 승리는 학교 교정에서 시작 되였다는 명언을 남겼으며 1871년 프랑스를 점령한 독일 전쟁의 영웅 몰트게 장군은 독일의 승리는 나와 독일군의 승리가 아닙니다.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공 입니다.이 모든 영광을 교사들에게 돌린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 현실은 어떠한가?
2003년부터 3년간 전북 임실의 한 중학교에서 학생들이 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비 전향 장기수들하고 빨치산 추모제를 지냈다고 한다.어린학생들을 빨치산 근거지였던 산에 데리고 가서 여기에서 해방구를 선언하고 국군을 공격하여 무기를 노획하고 옷을 빼앗아 입었다고 자랑을 하였다고 한다.그리고 공산당 창건60돌 6.15공동선언 해에 이제 통일은 다 되었다. 북한)사령부를 목숨으로 수호하고 양키를 섬멸하자는 등의 구호를 외치게 하며 친북 이념교육을 시켰다고 한다. 참가 학생들은 인터넷 카페를 통해 우리는 미국의 속국이다.부시가 괴질에 걸렸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등의 글을 올렸으며 전교조는 이 전에도 군대는 살인기술과 복종문화만 가르치니 안가는 게 좋다. 
민족에 충성할 필요 없으니 국기에 대한경례는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는데 과 6.25한국전쟁의 교훈을 제대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걱정 스럽기 그지없다

대한민국 무공수훈자회 나주시회장 이 형식(형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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