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막강변 한일선 옹의 향토사랑

  • 입력 2014.08.01 21:14
  • 수정 2014.08.02 15:35
  • 기자명 김병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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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막천은 영산강의 한 지류이다. 고막천은 장성군 삼서면 태청산(593m) 남동쪽 능선인 장승백이 골에서

▲ 김병균 고막원 교회목사
▲ 김병균 고막원 교회목사
발원한다.
이어 삼서면 유평리를 거쳐 함평군 월야면과 해보면 사이를 지나 나주군 다시면 동당리(학교면 석정리) 석관정(石串亭)에 이르러 영산강과 합류하게 되는 것이다.
광주-목포간 국도 1호가 지나는 고막교 바로 아래, 옛날 함평과 나주사이를 잇던 고막원 돌다리가 원고막 마을 앞에 놓여 천년의 무게를 지탱하며 지역의 명소로 관심을 끌고 있다.

고막원 똑다리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이 다리를 경계로 하여 농민군은 매봉산에 진을 치고, 관군은 밤산에 웅거하며 혈투를 벌였던 농민항쟁사의 처절한 역사현장인 것이다.


 
 
한일선 옹(왼쪽 사진) 은 1927년(丁卯年) 전남 함평군 고막리 48번지에서 출생한다. 원고막은 매봉산을 등지고 고막천가에 자리잡은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형 마을이다.
강 건너에는 나주평야의 일부인 나주군 문평면 산호평야가 널찍하게 펼쳐있다.
아침에는 백룡산 너머에서 햇빛 찬란한 동녘해가 떠오르면 냇가에서는 물고기가 뛰고, 논밭에는 부지런한 농부들이 소를 몰고 나아가는 평화롭고도 정겨운 농촌인 것이다.
한 옹은 7세 때에 이웃마을 복천리 장동에서 2년간 서당에 다녔고, 9세 때 학다리 보통학교(일정 때)에 6년간을 어름재를 넘어나다니면서 공부했다.

졸업 후 가세가 빈궁하여 중학교에 진학은 못하고, 한 마을 백기룡씨의 소개로 평양에 올라가 흥아 제포소 도랑쿠(트렁크-가방회사) 공장에 취직하여 다녔으나, 공장생활에 잘 적응을 못하고 귀향하여 농사에 전념하게 된 것이다. 당시는 태평양 전쟁이 한창이었던 전시상황이었다.
18세 때 무안 망운 비행장에 강제로 징용을 가게 되었고, 징용생활이 너무 힘들고 두려워서 하루하루가 견디기 어려웠다. 결국 30일만에 도망나와 피신을 다녀야 했다. 다시 19세 때 7월 아버지 대신 상무대 비행장에 끌려가서 일했다.
일본말을 상당히 한 덕에 반장직을 맡았다. 한 옹은 상무대 비행장에서 꿈에도 그리던 감격스러운 8. 15 해방을 맞게 되는 것이다. 6. 25를 전후해서도 좌익다 우익이다 상극이 돼서 싸우는 통에 잠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

한 옹은 평소에 인심을 잃지도 않고, 지혜롭게 처신한 결과 가족이나 이웃에 큰 피해는 없었다.
원고막은 예로부터 약 120여 가구나 되는 큰 마을이었다. 그러나 영산포 하구언이 막아지기 전, 또는 그 후에도 상습수해지였다.
함평 월야, 해보, 나산 쪽에 큰 비가 오면 원고막 앞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마침 밀물 때가 되면 석관정으로 물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결국 원고막 앞에서 큰 수해가 났던 것이다. 지붕까지 물이 차고, 가재도구도 다 젖어 버리고, 가축은 떠내려가는 수난을 거의 해마다 겪어야 했다.

한 옹은 생각다 못해 건너편 나주문평들로 집단 이주할 것을 결단한다. 정든 고향마을을 그래도 지키겠다는 주민들을 어렵사리 설득하고, 반대론자들의 의견에 대해 이해가 가도록 설명을 했다.
결국 나주군 문평면 산호리 금당마을 뒤편에 금산마을을 개척한 것이다. 24가구가 살 수 있는 터를 사고 농경지를 장만하고, 우물을 파고 마을길을 만든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오직 한 옹의 마음에는 해마다 물구덩에서 고통하는 가족들과 이웃의 고통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금산으로 이주한지 4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이제는 원고막도 더 이상 수해상습지에서 벗어나 살기좋은 마을로 개발되었다.
한 옹은 금산마을의 개척자로서 좌장 역할을 하면서, 어느 마을에 뒤지지 않는 화목과 단합으로 마을주민들과 함께 정답게 살아가고 있다.
농민운동에도 열심히 참여하였다. 1987년 부당수세거부 운동에 고막원교회 농민회 일원으로 참석하여 광주까지도 가고, 서울농민집회도 가고, 나주 중앙로에서 힘껏 투쟁했던 바 결국 수세는 농민들의 저항으로 없어지고 말았다.

과연 농민들의 승리요, 모두가 한맘으로 단결한 덕분이었다.
인생 80을 지내고 90을 바라보고 있다. 이 땅에서의 열매는 6남매 자녀들이다 공직에 교직에 진출하여 열심히 살고 있고 나름대로 효도를 한다.
아들들이 직장생활을 해서 어렵게 번 돈으로 동생들의 교육에 보태주어 자녀들이 배울 만큼은 배우게 되었다.
어려운 가정이지만 부부가 맘이 맞고 자식들이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면 어떤 역경도 이겨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한 옹은 인생의 황혼기에서 고막원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서 인생의 마지막을 하나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간다.
한 옹은 고막천변 8경을 잊을 수 없다. 소싯적에 서당 스승 가호 최정환(可湖 崔正煥)선생이 이 글을 지어주었기 때문에 지금도 금과옥조처럼 외우고 있다.

고막팔경(古幕八景)을 전하므로 향토사에 조그마한 보탬이 되고자 한다.

1. 고막석교(古幕石橋) : 고려 때 고막리 사람들의 숙원사업인 다리공사를 고막대사가 도술로서 하룻밤 사이에 지었다고 하는 돌기둥으로 엮어진 다리이다.(지방문화재 제 68호)

2. 용연해조(龍淵海潮) : 그 당시에는 밀물 썰물의 현상이 좀 심하게 일어났는데, 용연마을 앞에 밀려오는 물이 바닷물을 보는 것같은 장관을 이루었더라.

3. 호야주차(虎夜走車) : 고막평야 가운데를 지나는 호남선 기차, 광목간에 달리는 차량을 바라보면서 읊은 것이다.

4. 광진귀범(廣津歸帆) : 고막천에는 당시에 목포에서 고깃배, 소금배가 들어왔다. 특히 광진마을 앞으로 돛단배가 들어올 때, 해변의 정취가 있었다는 것이다.

5. 용봉현월(龍峯懸月) : 고막리 건너 문평면 백룡산에 둥근 달이 떠오르는 모습을 말한다.

6. 산호쇄연(山湖鎖煙) : 고막평야의 야트막산 산동네 평산에서 조석으로 밥을 짓는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나는 광경을 문장으로 그린 것이다.

7. 응봉귀운(鷹峰歸雲) : 고막리 뒷산 매봉산 봉우리에 비구름이 넘어가는 모습이 장관을 이루는 것을 보고 적은 문자이다.

8. 율산구우(栗山驅雨) : 호장마을 뒷산인 밤산에 비가 몰아오는 모습이 큰 일이 벌어질 것같은 형세글로 그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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