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통신원 강혁철 옹을 생각한다

김병균 목사(고막원교회, 나주시국회의 상임의장)

  • 입력 2014.10.01 09:07
  • 수정 2014.10.01 09:42
  • 기자명 김병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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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자천하대지본(農者天下大之本)이라, 예로부터 농사일을 세상사의 기본으로 쳤지만, 이 나라 역사상

농민이 이 세상에서 사람다운 대접을 받은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아니 결코 없었다.
나주군 문평면 학동리 수동 강혁철(姜赫喆)옹(85세, 筆名 : 강기원)은 구태의연하고 뒤지기만 했던, 농촌의 현실을 타개해보려는 꿈을 청년시절부터 가졌다.

자유당 시절부터 농민의 대변자로, 중앙방송 농촌통신원으로, 민족농업의 파수꾼으로 살아왔던 강혁철옹을 이 지역 농민들은 잊을 수 없다.
강혁철옹의 선친이신 강대우(1900년생, 姜大佑) 선생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강대우 선생은 문평면 출신으로서 서울에 올라가 중동중학교를 마친 후, 일본 유학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일찍이 일제의 강점하에서 왜놈 지주들의 수탈 속에서 신 대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농촌계몽과 문맹퇴치에 뜻을 가진 강대우 선생은 일제 때, 백룡산 정기가 서린 수동리 감냉기 마을 언덕배기에 ‘학동학원’(鶴洞學院)을 설립하였다.

빈농의 자녀로서 배우고 싶은 열심을 가졌으나, 보통학교에 갈 수 없는 아이들을 모아 야학을 세웠다.
교사들의 열심과 50여명 학동들의 향학열로 학동학원은 날로 넘쳐났다.
한글과 역사, 산술과 사회과학지식, 농사법 등을 가르쳤다. 일제의 엄중한 감시 속에서 주경야독으로 배우고, 가르친지 20여년의 세월을 넘긴 것이다.

강대우 옹은 민족교육 뿐 아니라, 비밀리에 독립운동가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당시로서는 엄두도 못낼 일이었다. 결국 일제말에 일경에 의해 체포되어 광주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그 험난한 징역을 살았다.

출소 시에는 고막원역 앞 도로가 막힐 정도로 지역주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나주경찰서 고등계 주임으로부터 농지를 충분히 내주어 생활을 보장할 터이니 독립운동에 관여하지 말라는 회유도 받았다고 한다.

대한민국 기록보존소의 기록에 의하면 강대우 선생 관련 판결문에 사회주의자로 지목되어 있는 까닭에 국가보훈처로부터 독립운동가로서 공식적인 추서가 보류 중에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분단된 조국의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강혁철 옹은 선친의 애국, 농민사랑 정신을 이어 받았다. 군사정권 당시 새마을 운동의 열기 속에 변화되어 가는 농촌 안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간과하지 않았다.
행정착오와 모순, 농민들의 불편사항에 대해 지역주민의 대변자가 되어 시정조치를 시키는 역할을 수 없이 감당해 왔다. 강혁철 옹은 1960-80년대, 지역 새마을 운동의 모습과 독농가와 독지가를 소개했다.
농촌생활의 발전안 제시, 농촌미담과 영농 성공사례 등이 방송되도록 농촌통신원으로서 역할을 다 해냈던 것이다.

1966년부터 1981년 11월 24일까지 15년간에 걸쳐 102편의 방송원고가 당국에 반영되어, 전파를 탔다.
당시의 농촌은 거의 유선앰프방송 시대였다. 주로 MBC 문화방송의 ‘밝아오는 우리 마을’, TBC 동양방송의 ‘푸른광장’, CBS 기독교방송의 ‘밝아오는 새마을’등의 프로그램에 기고한 글들이, 낭낭한 아나운서 목소리에 실려 전파를 타고 삼천리 방방골골 농민들의 가슴을 적시었던 것이다.

그는 청소년 시절부터 열정적인 문학 지망생이었다. 20세 때는 노산(鷺山) 이은상 선생의 지도를 받아 시를 공부한 적도 있었다.
23세 때는 장편문학 소설을 집필하다 중도에 하차한 일도 있었다. 그의 문학적 소질은 결국 농촌통신원으로서 우리 농촌의 실상을 알리는 도구로 사용되어 100회 방송소감을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른바 방송 모니터링의 선구자인 셈이다.

그의 활동상을 일일이 열거하기에는 지면에 한계가 있어, 년차적으로 특색있는 제목만 대충 발췌하여 열거해 보도록 한다.
‘4점식(4点式) 이앙(移秧)의 권장에 일언’(MBC, 1966년)
'음력정월(陰曆正月)을 반성해 본다(CBS, 1966년)
‘유실(有實) 녹화(綠化)의 문제점’(MBC, 1969년 3월 16일)
‘기업축산(企業畜産)과 초지(草地)문제(MBC, 1970년 3월 27일)
‘하곡수매(夏穀收買)의 문제점(MBC, 1970년 8월 14일)
‘농업부업(農業副業)의 문제점(MBC, 1970년 11월 27일)
'농약은 제대로 쓰여지고 있나(MBC, 1972년 6월 16일)
채소종자(菜蔬種子)의 문제점(MBC, 1971년 8월 6일)
‘꿀벌을 보호합시다(TBC, 1974년 8월 4일)
‘‘식량자급화를 위한 간접 증산에 역점을......(TBC, 1974년 5월 18일)
‘농산물의 적정 가격 보장에 관하여’(TBC, 1974년 12월 30일)
‘농약의 효과와 안정성’(TBC, 1975년 8월 5일)
‘건조기(乾燥機)의 공급을 바란다(MBC, 1976년 12월 7일)
‘죽세공으로 수입을 올리는 농한기 부업(TBC, 1977년 2월 15일)
‘풍년기근이란 기현상 없기를..(CBS, 1977년 12월 16일)
‘한우의 효과적인 사육체험담’(TBC, 1978년 4월 24일)
‘하곡가격의 인상을 촉구함(MBC, 1979년 5월 29일)
‘농약의 가격표시와 수화제(水和劑)의 그람용기를’(CBS, 1979년 12월 16일)
‘토양개량과 지력증산에 역점을.....(TBC, 1980년 2월 20일)
‘노후(老朽)의 취미양봉(趣味養蜂)’(CBS, 1981년 2월 28일)

송극(松克)은 노산 이은상 선생이 ‘소나무처럼 시련을 이기라’고 지어준 강혁철 옹의 호(號)다. 송극 선생은 문평면의 농사박사요, 근면성실한 분이다.
양봉, 꿩사육, 한우사육 등 농사와 축산을 실천하면서 글을 쓰는 깨어있는 농민이다.

성품은 온후하여 이웃근동에 인심도 넉넉하다. 노년에는 기독교신앙에 의탁하여 고막원교회에 집사로, 부인 노우영 권사와 함께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취미라면 독서와 정원가꾸기, 게이트볼 등이다.

금년 85세이니 백룡산을 등에 지고 고막강을 바라보며 농사와 글쓰기에 70여년에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
일제, 해방, 한국전쟁, 자유당, 4. 19, 5. 16이후 군부독재 시절, 광주민중항쟁, 민주화 시절 등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아왔다. 모든 소망을 하늘나라에 두고, 날마다 노년의 한가한 삶을 낙으로 삼고, 고막강 뒤 매봉산으로 기울어가는 저녁노을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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