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고 노동자들의 절규를 들으라

  • 입력 2014.11.17 09:38
  • 수정 2014.11.17 09:40
  • 기자명 김병균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 혼탁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상식 이하의 일을 당할 때, 무슨 황당한 사건이 전개되는 것을

보면서 하는 말이 있다. ‘이럴 수가 있어요?’ ‘이런 법이 어디 있어요?’ 하면서 개탄해 마지 않는다. 법을 근거로 하여 사건에 대한 판단을 하는 기관이 바로 사법부요, 곧 법관이 하는 일인 것이다.

최근 ‘쌍룡 노동자 정리해고’에 대한 대법원 판결이나, ‘세월호 참사’의 범죄자들에 대한 재판결과를 볼 때, 국민들의 법 감정과 상식에 도무지 맞지 않는 판결이 나온 것은 나만의 편견은 아닐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은 ‘법관은 헌법과 법률과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헌법106조)고 규정하고 있다.

2009년 쌍룡자동차 정리해고 사태 이후, 공장 밖으로 쫓겨난 노동자들이 무려 2600명이 이른다고 한다. 노동자 1인 당 4인 가족을 잡고, 1만여명의 생계가 막연해 진 것이다.

이에 대한 해고노동자들의 ‘해고무효 확인소송’에서 대법원은 11월 13일(목) 원심을 깨고 노동자들의 정리해고가 유효하다고 판결했다. 대법원은 재벌인 회사 쪽 주장만 받아들이고, 노동자들의 생존권적 입장과 고통을 철저히 외면한 판단을 한 것이다. 더욱이 이 날은 한국 노동운동의 상징인 전태일 열사 44주기가 되는 날이었다.

이 판결이 내려지자 밀양 송전탑 반대 한옥순 할머니는 울음을 터트리면서 ‘이 세상에 법이 있다면 이런 판결이 나올 수 없다’며 대통령, 재벌, 법관들이 한통속이 되어 국민보고 죽으라고 한다‘고 목놓아 소리쳤다. 금속노조 쌍룡차 지부 이창근 대변인은 ‘숨 쉴 곳 없는 이 사회에 한 줄기 빛이 되는 판결이 나오기를 바랐는데, 결국 재판부는 전관예우와 친재벌 속성을 버리지 않았다’고 울분을 토했다.

문제의 쟁점은 쌍룡회사가 과연 이 많은 노동자들을 해고할 만한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있었는가? 회사가 해고를 피하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가 하는 것이다.

대법원은 쌍용차가 유동성 위기, 즉 자금을 조달하지 못할 수도 있는 위기에 더해, 신차 출시가 어려워지고, 기존 차종의 매출이 감소하는 등 구조적 경영의 위기였다고 봤다. 판결의 내용을 보면, 판결문이라기 보다는 쌍용회사를 변호하는 변호사의 변론으로 보여지는 대목이다. 이에 관해 쌍용차 노조지부는 ‘2008년 12월 기준 현금 보유액이 775억원, 회수 가능한 매출 채권 1천 142억원 등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쌍용차는 정리해고 두 달 뒤 부동산을 담보로 1300억원 대출을 받았다고 한다. 또 항소심은 당시 쌍용차 회계보고서의 손실액을 부풀려 재무상황 악화를 과장했다고 보았다.

그러나 대법원은 ‘회사쪽 추정이 다소 보수적이라도 합리성을 인정해야 한다’고 정반대의 입장을 밝혔다. 대법원은 사실의 옳고 그름을 밝히는 사실심이 아니고, 법리 적용의 옳고 그름을 따지는 법률심이다. 대법원은 항소심에서 마친 사실인정의 문제까지 굳이 손을 댄 것은 참으로 의아스럽다. 그 판단까지 회사의 주장을 지지해 주고 있지 않는가?

쌍용노동자 정리해고 이후로 5년 어간에 걸쳐 25명이 목숨을 끊었다. 우리 국민들은 이 안타깝고 불행한 사태를 일상적인 뉴스로 생각하고 지나쳐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이 문제에 대해 가슴아파하는 것은 인지상정(人之常情)이 아닌가....

노동자에게 있어서 ‘해고는 사형’이다라는 말은 단순한 말에 그치지 않는다. 쌍용차 복직투쟁과정에서 힘있는 자들에게 저항하다 발생한 피해액을 몽땅 수십억의 벌금으로 매겨서 해고자들을 더욱 옥죄이고 있다.

구약성경 출애굽의 영적, 민족적 지도자 모세는 재판관들에게 주어진 책임을 강조했다. 모세는 재판이 성실하게 이루어지도록 각 지파에서 지혜있는 사람들을 택했다. 모세는 그들이 옳은 판결을 해야 만하는 이유로서 재판은 ‘인간의 양심’에 근거한 자연법적인 특성이라는 것과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는 신적인 이유를 제시한다.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너희는 재판할 때에 외모를 보지 말고 귀천을 차별없이 듣고 사람의 낯을 두려워 말 것이며 스스로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 있거든 내게로 돌리라 내가 들으리라..’(신명기 1 : 17)
프랜치스코 교황은 교회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물질주의의 유혹과 무한경쟁의 사조
에 맞서 싸우고, 새로운 형태의 가난을 만들어 내고, 노동자를 소외시키는 비인간적인 경제모델을 거부하라‘고 촉구했다.

‘싸우고, 거부하고 배척하라’고 단호한 행동을 요구한 것이다. 교황의 메시지는 온 국민들과 지식인들, 민중들의 가슴을 절절히 끓어 오르게 했다. 결국 약자와 함께 하신 그리스도의 교훈과 삶을 따르라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믿는 교회나 종교단체는 사회적 모순과 힘있고 가진 자들의 횡포에 의해 죽어가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를 비롯해서 인권의 억눌림에 신음하는 이들의 절규하는 소리를 들어야 할 것이다.

11월 중순이다. 날씨가 급격히 차가워지고 있다. 1만여명의 해고노동자 직계가족들, 그의 이웃들, 노동자 동지들, 온 국민들은 쌍용회사나 대통령은 그리고 시민단체와 국민들은 해고노동자에게 다시 일자리를 주는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다.

해고노동자들을 그대로 죽게 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타락한 사법부를 기대한 것 자체가 부질없는 일 일수도 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로 생각하면 답이 나올 수 있다. 정부와 회사 그리고 시민단체, 민중단체가 문제해결에 나서야 한다. 이 땅에 정의와 평화, 생명과 나눔을 위해서 산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 부자가 된 대교회, 대성당 그리스도교와 종교단체의 관심과 참여가 절절히 요구되는 시기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바이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