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현 선생은 누구인가?

  • 입력 2015.04.13 13:58
  • 수정 2015.04.13 13:59
  • 기자명 나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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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찬용 축제 추진위원장
▲ 정찬용 축제 추진위원장
안성현 선생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 7월 13일 나주 남평읍 동사리에서 태어나서 남평초등학교를 21회로 졸업하고 본디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을 갈고 닦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의 도호음악학교 에서 음악을 전공하고 돌아와 청년시절 음악교육과 창작활동에 전념하여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부용산등 23곡의 주옥같은 곡을 만들고 작곡집을 발간하는 등 우리나라 근대음악사에 선구자적 업적을 남겼다.

특히 일제의 강점으로 민족의 진운이 암울했던 시절 희망을 잃지 말자며 금빛모래와 갈대가 있는 평화로운 강변에서 엄마랑 누나랑 살기를 간절히 바라는 김소월의 시(詩)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에 안성현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난 고향의 드들강(지석천) 강변의 풍광에 맞추어 우리민족에게 희망을 잃지 말자는 낭만적인 노래로 만들어 해방직후 미 군정청이 발간한 초등학교 음악교재에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가 실렸으며, 3부합창곡 '진달래'가 중등음악교재에, 당시 이 희성 교수의 고등음악 교재에는 봄바람' 등이 실리는가 하면 젊은 나이에 요절한 누이를 잃은 애통함을 표현한 박기동의 시(詩)에 곡을 부친 '부용산'은 남도 민초들의 가슴속 한을 대변 하는 민중의 노래로 승화되어 안치환, 한영애, 이동원, 국소남 등 많은 가수들이 음반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이러한 우리나라 근대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기고도 한국전쟁 중 평양의 문화행사에 참석하러 갔다가 38선이 그어지는 바람에 돌아오지 못하고 월북 작곡가 라는 비운의 삶을 살다가 2006년 4월25일 평양에서 돌아가신 故 안성현 선생에 관한 부고 기사가 2006년 5월13일자 북한의 문학신문에 "민족음악 전문가인 공훈예술가 안성현 선생이 노환으로 4월25일 오후 3시 86살을 일기로 애석하게 서거했다. 전라남도 나주군 남평면에서 태어난 안성현 선생은 조국해방전쟁시기 (6.25전쟁)에 공화국의 품에 안긴 후 오랜 기간 민족음악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선생은 음악예술 부문에서 지휘자, 작곡가, 연구사로 일하면서 가치 있는 음악작품을 창작하는 한편 민족음악 유산을 수많이 발굴, 정리해 민족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강조한 기사가 보도됐다고 연합뉴스가 보도 하였다.

이 보도를 접한 선생의 고향 나주 남평의 후배들이 최정웅 선생을 중심으로 한 '엄마야누나야 노래연구회'와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 건립 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2009년 4월30일 선생의 고향 나주 남평 드들강변 솔밭에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노래비를 건립하였다. 이날 노래비 제막식에는 안성현선생의 미망인 성동월여사가 참석 하시어 노래비를 쓰다듬으며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아홉시 뉴스에 보도되면서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인해 생이별하고 평생을 좌익아닌 좌익으로 몰려 지옥 같은 삶을 살아온 한 여인과 가족의 비극이 회자되기도 했으며 성동월 여사(93세)는 지금도 서울에서 친손자 안세준의 가족들과 함께 살고 계신다.

이후 같은해 엄마야누나야 노래연구회를 안성현 노래연구회로 개명하고 70여명의 다음 카페 회원을 중심으로 활동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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