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투 나주

나주의 과거, 현재, 그리고 비전

  • 입력 2015.05.04 13:57
  • 기자명 나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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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관영(나주시 기획예산실장)
▲ 김관영(나주시 기획예산실장)
최근 빛가람동의 공공기관 이전을 시작으로 우리시 인구가 9만선을 회복했다. 1965년 25만을 정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한 이래 실로 50년만에 인구가 증가세로 돌아선 것이다. 그래서 요즘 흥이 나서 외지분들에게 나주를 알리고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바다를 품은 나주
삼봉 정도전은 나주를 ‘남방의 거진巨鎭’이라 했고 다산 정약용은 ‘내해內海의 주인’이라 했다. 통일신라시대 다시면 회진은 당나라 등 외국과 교류하던 국제 포구였고 영산포는 조선시대까지 세곡을 모아 수송하던 조창이자 일제의 수탈 기지였으며 목포(현 나주역 자리)는 태조 왕건이 상륙한 곳이자 고려시대 나주 팔관회에 외국인들이 출입하던 포구였다.

이렇듯 나주는 영산강 하구언 축조로 뱃길이 끊기기 전까지 항구도시였으며 나주인들은 바다를 누비며 남중국까지를 아우르던 한국의 대표적인 해상세력이었다.

나주인의 세가지 유전자적 특징
그렇다면 나주사람들의 피에 흐르는 유전자적 특징은 무엇일까?
첫째, 나주인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혁명가적 기질을 가지고 있다.

후삼국 격변기에 예성강 세력 왕건과 함께 고려를 창건하여 천년동안 전남의 정치, 경제의 중심지 나주를 만들어냈으며 삼봉 정도전은 고려 말 나주에 귀향 와서 지역민들에게 호된 꾸지람을 들어가며 조선개국의 꿈을 구체화했다.

둘째, 나주인은 목숨바쳐 국난극복에 앞장서는 충절과 의향정신을 지니고 있다. 임진왜란때 김천일 선생이 호남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으며 단발령 항거, 학생 독립운동, 구한말부터 해방후까지 50년 넘게 농민의 궁삼면 토지회수 투쟁, 노동운동 등 항일과 사회개혁 운동을 주도했다.

마지막으로 화합과 개척정신이다. 1950년대 호남비료공장을 유치할 때 그 배고프던 시절 나주의 여성들은 좀도리 운동(밥을 지을 때 한주먹씩의 쌀을 아껴서 모으는 운동)으로 자금을 모았으며 2천년대에는 참여정부의 국가균형발전정책에 적극 동참, 빛가람 혁신도시를 유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나주를 중심으로 세상이 바뀝니다
최근 기초전력연구원장으로 취임한 서울대 문승일 교수의 말씀이다. 이분은 남북분단은 당시 남한전력 수요량의 2/3를 공급하던 북한에서 일방적으로 전기를 끊어버린 1948년 5월 14일 시작되었으며, 이제 거꾸로 전기 강국이 된 남한이 북한에 전기를 공급함으로써 남북 평화통일을 앞당길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분의 말씀대로라면 통일왕조 고려를 창건했던 나주가 한국전력을 품에 안고 또 다시 통일의 물꼬를 열어가는 지역으로 발돋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지금 나주는 빛가람동의 에너지, 농업, 문화예술, 정보통신을 아우르는 16개 이전기관, 영산강, 독창적인 역사문화를 자산으로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있다. 천년 목사고을 역사수도에서 대한민국 에너지 수도로, 식량주권을 지키는 생명의 땅, 그리고 사물인터넷 시대를 이끌어가는 3차 산업혁명의 허브로, 새로운 통일시대를 이끌어가는 동북아의 중심도시로의 비전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웰컴 투 나주
나주에 옮겨오신 이전기관 임직원 여러분!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나주는 과거에도 그랬듯이 미래에도 여러분이 둥지를 틀기에 충분히 매력있는 지역입니다.

빛가람동에 이사오신 시민 여러분! 맹모삼천지교처럼 아주 현명한 선택을 하셨습니다.
대한민국의 새로운 천년을 열어가는 나주사람이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웰컴 투 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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