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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훼퍼의 생애와 교회의 정의운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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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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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병균 목사
                                 올해로서 그리스도 신앙으로 나치의 불의에 항거하다 사형당한 본훼퍼 목사 순교 70주년을 맞는다. 선교초기 한국교회에는 서구열강의 침탈과 탐관오리의 부패로 기울어가는 나라의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우국청년들이 모여들었다. 병원선교, 학원선교, 가난한 민초들의 복음전도에 초점을 맞춘 선교정책은 암울했던 시대에 희망을 주는 민족의 등불이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는 신앙과 삶에서 십자가 신앙은 찾기 어렵고, 번영신학이 만연하고 있으며, 일부 대형교회의 세습과 부패, 세상금권정치를 뺨치는 교단 총회장 선거에 수십억이 뿌려지는 등 교계 지도자들은 타락의 길로 가고 있다.
 
맘몬주의에 물든 교회는 신뢰와 존경은 커녕, 세상의 지탄과 조소의 대상이 되고 있지 않는가! 교회가 사회의 기대로부터 외면되고, 갈수록 목사의 신뢰도가 추락하는 가슴 아픈 한국교회의 현실 속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행동하는 신학자’ ‘하나님의 정의의 실천자’ 본훼퍼 목사에게서 무엇을 배워야 할 것인가?

본훼퍼(Dietrich Bonhöffer, 1904-1945년)는 1904년 2월 4일 독일 브레슬라우에서 8남매 중 여섯째의 쌍둥이로 출생했다. 본훼퍼는 1923년 튀빙겐대학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한다. 1929년 베를린에서 신학공부를 계속한다.
 
1927년 12월 ‘성도들의 친교’(Sanctorum Communio)라는 제목으로 신학 박사학위를 수여받는다. 그는 1939년 미국 유니언 신학교에 가서 신학을 연구하면서, 흑인 빈민들의 삶의 문제에 관심을 갖고 매주 흑인교회에서 예배드린다.

1931년-33년까지 베를린 대학교의 강사 겸 베를린 공과대학의 교목으로 일한다. 이 때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참여한다.

1933년 1월 30일 히틀러가 독일의 총통이 되었다. 1933년 4월 7일 나치정권은 아리안법을 제정한다. 유태인 혈통을 배격하고, 유태인과 결혼한 독일인들의 공직을 박탈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된 것이다. 독일의 개신교회는 이 악법을 인정한다. 그러나 본훼퍼는 친구 자쎄와 함께 유태인을 변호하고, 히틀러를 반대하는 베털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여 니뮐러(M.Niemoeller)의 이름으로 발표한다.

이 고백서는 히틀러에 대한 저항정신을 충분히 나타내지 못했다. 아리안 법에 대해 베를린 대학교 교수들이 침묵을 지키는데 실망하여, 본훼퍼는 교수직을 버리고 영국 런던으로 건너간다. 거기에서 목회하면서, 칼 바르트(K. Barth)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던 고백교회에 대한 세계 교회의 이해와 협조를 요청하는 활동을 전개한다.

1935년 독일로 돌아온 본훼퍼는 1939년까지 핑크발트에 위치한 고백교회 신학교의 책임자로 봉사하면서,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신도와 공동생활’을 집필한다. 나치당국의 주목을 받아왔던 핑크필트 신학교가 비밀경찰국장 히믈러에 의해 폐쇄되고 만다.
 
본훼퍼는 1939년 6월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다. 그는 미국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하면서, 독일 피난민들을 위해 봉사활동을 한다. 그러나 독일의 상황을 포기할 수 없다고 결단한다. 친구인 신학교수 라인홀드 니버(R. Niebuhr)의 권유를 물리치고 7월에 독일로 귀국하여 집단목회 훈련원의 책임자가 된다. 이 때부터 1943년까지 본훼퍼는 정치적 투쟁을 전개하다가 교수직을 박탈 당하고, 모든 활동을 경찰에 신고해야 한다는 명령을 받는다.

1940년 본훼퍼는 매형 도나니를 통해 히틀러 정권 암살 모의에 참여하게 된다. 1941년 정보 파악을 위해 뮌헨 주재 민간 정보원으로 파견된다. 1943년 4월 5일 비밀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베를린 소재 군 영창에 감금된다. 여기서 그는 많은 편지를 쓰는데, 이 편지들이 그가 사형 당한 뒤에 ‘저항과 복종’이란 제목으로 출판된다.

1943년 1월 8일 본훼퍼는 비밀경찰 감옥으로 옮겨진다. 1944년 7월 카나리스 장군의 히틀러 암살 전모가 밝혀진다. 그의 일기장에서 본훼퍼의 이름이 발견된 것이다. 이로 인해 본훼퍼는 1945년 1월 7일 부헌발트 강제수용소에 국제전범들과 함께 투옥되었다가, 그 해 4월 9일 이른 아침 플로썬부르크에서 교수형을 당한다. 본 훼퍼는 위대한 순교자이었다. 곧 이어 히틀러는 자살했고, 독일은 연합군에게 항복한 것이다.

본훼퍼는 히틀러에게서 ‘악(惡)이 빛, 선행, 진실, 갱신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역사적 필연성이나 사회적 행태로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즉 ‘빛의 천사의 형태에 숨어 있는 사탄’을 본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적 그리스도의 세계에 동화되어가는 교회를 보았다.

만일 본훼퍼의 눈으로 오늘의 현실을 본다면 그것은 신자유주의 시장경제체제 속에서
만연된 물신풍조일 것이다. ‘세상은 거의 그리스도교 세상으로 변했고, 은혜는 그리스도교 세계의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그것은 값싸게 구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본훼퍼는 바로 값싼 은총으로 변질되어 버린 그리스도교 신앙의 온전함을 회복하고, 우상의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존하고 강화하고 치유하고자’ 분투했던 것이다.

본훼퍼는 교회를 오직 타자를 위한 존재일 때만 교회인 것으로 보았고, 신학을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타자를 위한 ‘도움의 수단, 하나의 투쟁의 수단’으로 보았으며, 윤리를 타자와 함께 ‘더불어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필자는 계속해서 본훼퍼 목사의 신앙고백과 신학, 타자를 위한 하나님의 정의, 평화, 사랑의 도구로서의 교회성에 대해 조명해 나아가고자 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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