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이 있는 삶

  • 입력 2015.11.09 12:23
  • 기자명 나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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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하 교수
▲ 박상하 교수
서울대 학생들만 가입할 수 있다는 온라인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에 올라온 글 때문에 논쟁이 뜨겁다고 한다.

한 여학생이 9급 지방직 공무원을 직업으로 선택한 이유 때문이다. 이 학생은 퇴근 후와 주말에는 온전히 가정을 위해서 시간을 보낼 수 있으며 중요하게 생각하는 건 ‘저녁이 있는 삶’이라고 썼다.

이 글은 게시 후 닷새 만에 1만1800여건의 조회 수를 기록했다. 학생들의 반응은 찬반으로 극명하게 갈렸다.

논란이 커지자 글은 삭제되었지만 2030세대의 고민은 계속되고 있다.
그들이 주고받은 내용에는 대기업에 들어갔지만 서른 초반에 퇴직하고 전업주부로 애 키우는 것보다 9급 공무원이 더 괜찮은 진로라고 생각한다. 다른 졸업생은 아이 낳고 보니 어른들이 왜 공무원이나 전문직 노래를 불렀는지 알겠다고 했다.

반면 서울대 가봐야 뭐 있느냐고 시비 거는 이웃·친척들에 대한 난처함을 토로하는 글도 있다. 아무리 취업 전쟁이 힘들다고 하지만 현실을 인정하기 싫다는 학생도 있었다.

청년들의 취업이 어렵다는 것도 문제지만 한국사회의 의식구조와 가치관은 고삐가 풀려버린 느낌이다. 저녁이 있는 삶은 정치인의 대선 슬로건으로 등장하면서 낭만적인 복지국가를 상상하게 하였다.

그것은 가족과 함께하는 모습에서 우리의 풍요로운 복지사회를 꿈꾸고자하는 소망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지금 너무 바쁘게 살고 있다. 포근한 햇살을 벗 삼아 거리의 카페에서 친구들과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는 모습보다는 남보다 앞서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이 익숙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이런 것이 아니라고 해도 딱히 방법이 없다. 모두가 가는 길을 나도 가고 있을 뿐이다. 그 대열을 벗어나기만 하면 평화롭지만 세상은 그를 루저로 간주한다.
올해 OECD 36개국 중 삶의 만족도 조사에서 한국은 29위라고 한다.

물질적인 삶은 나아졌지만 나이가 들수록 만족도는 떨어지고 필요할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친척이나 친구가 없는 나라로 변해버렸다.

여전히 한국인은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며 일과 삶의 균형지수에서도 33위였다. 부모와 자녀가 함께 보내는 시간이 가장 짧은 나라로 하루 48분이라고 한다. 특히 아버지가 자녀와 함께 놀거나 공부를 도와주는 시간은 고작 3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DP대비 복지예산비율이나 조세의 소득불평등 개선효과는 최하위를 맴돌고 있다. 이런 이유인지는 몰라도 출산율과 평균수면시간은 꼴찌이며, 자살률과 노인빈곤율은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다.

청년들은 이제 노력을 포기하고 한국을 떠나고 싶어 한다. 국정감사장까지 등장한 헬조선이란 신조어는 청년들의 분노하는 함성처럼 들린다. 이 말은 청년층을 중심으로 퍼졌지만 치열한 삶에 시달리는 중장년층과 노년층에 까지 번지고 있다.

최근 한 설문조사에서 이민을 고려하는 이유로 ‘갈수록 빈부격차와 소득불평등이 심해져서’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젊은이들이 이민을 생각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준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청년들이 말하는 수저론은 더욱 애절하다.

부모의 재산과 사회적 지위에 따라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로 구분하는 새로운 신분사회를 비웃고 있다. 금·은수저를 물고 태어나면 영어유치원과 사교육을 거쳐 명문대와 유학까지 마치고 취업전선에 나오지만, 흙수저를 물고 태어나면 학자금대출로 빚만 안은 채 사회생활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들이 바라보는 세상이 보이지 않는 카르텔로 가득차 있고 이제는 무너뜨릴 수 있는 노력에도 한계를 느끼는 모양이다. 도피하듯 이민을 생각하는 청년들에게 기성세대들이 해답이 무엇인지 대답해야 한다. 기득권 계층이 펼쳐놓은 카르텔의 울타리를 이제는 무너뜨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른다.

기성세대는 산업화와 민주화로 인정받았다. 지금의 청년들은 그 부작용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청년들이 꿈꾸는 저녁이 있는 삶, 우리 모두의 꿈이 되기에 충분하다. 청년들의 꿈과 희망을 위한 도전이 상처받게 하지 말아야 할 책임은 기성세대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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