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 만에 고향찾은 서성문 안 석등은?

  • 입력 2017.05.16 11:01
  • 기자명 정찬용 시민기자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지난 11일 88년만에 고향을 찾은 나주시 서성문 내 석등은 단순한 석등이 아닌 민초들과 함께 한 역사적 상징물이며 전라도와 호남지역의 1천년을 밝히는 새로운 등불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박중환 국립나주박물관장은 “석등은 단지 시각적인 어두움을 밝히는 용도로만 생각치 않고 중생들의 어두운 마음의 밤을 밝혀 모든 사람들이 지혜의 눈을 뜰 수 있게 한다는 의미로 사찰의 불전 앞마당에 불탑과 함께서서 부처님의 대광명을 상징하는 광명등 이었다”고 말하고 “반남면 신촌리 9호분에서 국보인 금동관을 발굴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에 일제강점기에 고향을 떠난 보물 석등이 나주로 돌아온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으며, 내년의 전라도 정도 1.000년을 맞아 서문석등이 전라도와 호남지역의 1,000년을 밝히는 새로운 등불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이렇듯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는 나주 서성문 안 석등(羅州 西城門 石燈)은 불교문화가 융성했던 고려 선종 10년인 1093년에 만들어져 옛 나주읍성 서문안에 있던 것을 일제강점기인 1929년 서울 경복궁으로 옮겨져 창고에 보관하고 있다가 2001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전했다.

당시 불발기집 (화사석·火舍石)과 둥근 공 모양의 꼭대기 장식(보주·寶珠) 등이 파손돼 새로 만들어 끼워 놓았다. 석등은 당초 나주 흥룡사(興龍寺)라는 절에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현재 흥룡사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3.27m 높이의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통을 이어받아 불을 밝히는 불발기집을 중심으로 아래에 3단을 이루는 받침돌을 두고 위로는 아름다운 형태의 지붕돌 (옥개석·屋蓋石)을 얹은 형태로, 짜임새가 있고 조각도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석등은 지대석과 간주석, 그리고 화사석과 옥개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지대석은 널찍한 사각형의 굽형인데, 면석(面石)에는 1면에 3좌의 안상(眼象)을 새기고 그 안의 중앙에 고사리 무늬, 좌우에 구름무늬를 조각하였다. 상단에는 2단의 받침을 두었는데, 하단은 높고 상단은 낮으며 형태는 호형(弧形)으로 처리하였다. 하대석은 지대석과 같은 돌로 되었는데, 연화 대석에 8엽(葉)의 복엽(複葉)으로 조각되었다.

능선은 거의 수평을 이루다가 꺾여지고 자엽(子葉)과 간엽(間葉)도 밋밋하여 볼륨감이 떨어진다. 그 위로 3단의 간주석 받침이 있는데, 그 가운데 중단은 높은 호형으로 처리하였다. 간주석(杆柱石)은 팔각형으로 각 면 모서리마다 우주(隅柱)를 새기고, 상·하단에 가로로 된 단대(端帶)를 놓아 마치 직사각형의 액(額)처럼 되었다. 그 안에는 1행씩 8줄의 명문이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南贍部州高麗國羅州/中興里□長羅左堅應/迪孫□先月心光□□心/聖壽天長百穀登/錦邑安泰富貴恒存/願以燈龕一坐石造排立/三世諸佛聖永獻供養/大安九年癸酉七月日謹記
이 명문은 읍성의 안녕과 부귀를 얻고자 불감 1좌를 삼세불에 공양하기 위해 대안 9년 계유년, 곧 1093년 7월에 조성하였다는 내용이다. 국립나주박물관은 나주 서성문 안 석등을 박물관에 전시하면 고려시대 나주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고 널리 알리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저작권자 © 나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