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박물관후원회, 마한문화아카데미 봄 답사

정찬용 기자의 충무공 이순신의 전적지 여수, 순천 답사 동행기

  • 입력 2018.04.25 11:17
  • 수정 2018.04.25 11:19
  • 기자명 정찬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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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나주박물관후원회(이사장 이순옥)가 주관하고 국립나주박물관(관장 박중환)이 후원하는 2018 마한문화아카데미 봄 답사 프로그램 충무공 이순신의 전적지 여수, 순천 답사가 4월12일 오전 8시부터 박물관 학예연구사를 비롯한 회원 등 31명이 참가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지난 3월 26일부터 국립나주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임진왜란 특별전 호남의 임진왜란, 그 승리의 기록, 무숙공 최희량이 쓴 임란첩보서목과 연계 하여 충무공 이순신의 전적지를 돌아보는 이번 답사의 첫번째 코스는 여수시 중앙동 진남관 앞에 자리한 진남관임란유물전시관에 들러 조미숙 여수시관광 해설사의 안내로 전시관을 둘러 보았다.

전시관에는 임진왜란 때의 해전 상황도와 지자총통, 사조구, 천자포, 승자총통 등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특히 거북선 내부모습을 재현해 놓은 공간과 뱃길에 철쇄를 걸어서 왜군의 배들을 격퇴했던 장치 비격진천뢰 등은 이순신장군의 지혜와 지략을 엿볼 수 있는 귀한 자료였다.

임란유물전시관 관람을 마친 일행은 진남관으로 향했다. 진남관은 초대형 가건물을 지어 덮어두고 보수공사를 진행 하고 있었다. 보수공사는 2015년 12월9일 부터 2020년 4월15일까지 진행된다 고 한다.

진남관에서 일행은 조미숙해설사와 국립나주박물관 이효종 학예연구사의 해설과 함께 보수공사중인 진남관을 둘러 보고, 홍두식 감리단장으로부터는 공사현황 보고를 듣고, 홍보 동영상을 시청하면서 진남관 건물의 크기와 규모에 압도 되었다.

 
 
국보 제304호로 지정된 진남관은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영의 본영 지휘소로 삼았던 진해루터에 세운 수군의 중심 기지로, 임진왜란 종료 이듬해인 1599년, 이순신의 후임 통제사 겸 전라좌수사 이시언이 정유재란 때 불타버린 진해루 터에 75칸의 대규모 객사를 세우고, 남쪽의 왜구를 진압하여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진남관이라고 이름 지었고, 현재의 건물은 1716년 화재로 불탄 것을 2년 후인 1718년(숙종 44) 전라좌수사 이제면이 중창 했으며, 68개의 기둥으로 구성된 건물의 규모는 정면 15칸, 측면 5칸, 건물 면적 792m2로 현존하는 지방관아 건물로서는 최대 규모인 진남관은 일제강점기 때는 여수공립보통학교 교사로 사용되었다 한다.

계속해서 일행은 진남관 동쪽 200여미터 지점 여수시 고서동에 위치한 여수통제이공 수군대첩비가 모셔져 있는 고소대를 이효종 학예연구사의 해설과 함께 둘러 보았다.

통칭 좌수영대첩비라 부르는 이 비는 보물 제571호로 높이 305㎝, 너비 124㎝, 두께 24㎝. 우리나라 최대의 대첩비로, 1620년(광해군 12)에 건립되었으며, 여수통제이공수군대첩비의 비문에는 이순신의 활약상이 적혀 있어 해남·노량·고금도·통영·아산 등에 세워졌던 충무공전공비와 함께 애국충절의 일면을 살필 수 있었다.

비문은 1615년에 당대의 명사 이항복이 지었고, 글씨는 명필 김현성이 썼으며, 비신 상단의 통제이공수군대첩비라는 두전은 김상용이 썼다 한다.

고소대에는 여수통제이공수군 대첩비와 함께 이충무공이 세상을 떠난지 6년 후인 선조 36년(1603), 막하에 있던 장수들이 장군의 거룩한 덕을 눈물로 흠모하기 위해 세웠다는 보물 571호 좌수영타루비가 함께 모셔져 있었다.

한편, 비각 앞에는 1698년(숙종 24) 남구만이 지은 형지기(조사한 상황이나 전말을 기록한 책) 기문이 세워져 있었다. 이 기문에는 이순신의 막료로 활약 하였던 수군통제사 유형과 좌수영 지역의 유지 및 후손들의 노력으로 1620년에서야 비로서 여수통제이공수군대첩비를 건립하게 되었으며,  이 때 타루비(보물 제1288호)도 대첩비 옆으로 옮겨 세우고, 비각을 세워 보존하였다는 비 건립 전후의 전말이 밝혀져 있었다. 고소대 오른쪽 담장 옆에는 1966년, 우리나라 최초의 복싱 미들급 세계챔피언 김기수 선수의 복싱 체육관이 남아 있어, 애국애족의 전.근대 유물이 묘한 조화를 보여 주고 있었다.

점심을 마친 일행이 들른 곳은 하멜전시관 이었다. 이곳에서는 이미경 여수시 관광 해설사의 설명으로 전시관을 둘러 보았다.

네덜란드 호르콤시에서 출생한 헨드릭 하멜 이 동인도회사 선원으로, 스페르웨르호 상선을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1653년 8월 16일 일행 36명과 함께 제주 해안에 표착 하여 13년간 조선에서의 생활을 자세히 소개한 보고서 형태의 하멜표류기로 우리나라를 서방세계에 최초로 알리게 되었다.
 
하멜표류기는 하멜이 월급을 받기위해 표류기간 동안 자신들의 행적을 꼼꼼히 적었던 것에 기인한다.는 해설이 아이러니한 역사의 단면을 느끼게 했다.

 
 
1648년 암스테르담에서 건조된 3층 갑판의 범선으로 수송과 연락의 역활을 했던,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으로 하멜 일행을 태우고 일본 나가사끼로 항해하다 난파된 스페르웨르호를 모델로 재현한 전시관은 전장 36.6m, 폭 7.8m, 갑판높이 11m, 돛대높이 32m의 규모로, 제1전시실 2층에는 핸드릭 하멜의 제주도 표착과 국내에서의 생활이 모형과 그래픽으로 전시되어 있고, 제 2 전시실(1F)에는 2002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와 히딩크 감독에 관하여 전시된 공간으로 네델란드 정부에서 기증한 하멜보고서 사본이 전시되어 있고, 갑판층 3층에는 유럽 상선의 구조가 원형 데로 재현되어 있어 17세기의 화려했던 유렵범선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일행이 들른 곳은 순천시 해룡면에 위치한 순천왜성이었다. 이곳에서는 이효종 학예연구사의 해설로 순천왜성을 둘러 보았다. 정유재란(1597年) 당시 육전에서 패퇴한 왜군 선봉장 우끼다 히데이와 도오다 까도라가 호남을 공략하기 위한 전진기지 겸 최후 방어기지로 삼기 위해 3개월간 쌓은 토석성으로 왜장 소서행장이 이끈 1만 4천여 명의 왜병이 주둔하여 조·명 연합군과 두차례에 걸쳐 격전을 벌였던 곳으로 남해안 26 왜성 중 유일하게 한 곳만 남아 있다 한다.

순천왜성은 수륙 요충지로서 성곽 규모가 120,595m² (36,480평), 외성 2,502m, 내성 1,342m 로 외곽성(토석성)3개, 본성(석성) 3첩, 성문 12개로 축조된 성곽으로 검단산성쪽의 육지부를 파서 바닷물이 차도록 섬처럼 만들고 연결 다리가 물에 뜨게하여 예교, 왜교성이라 하며 일인들은 순천성이라 부르고 있다.

나지막한 송림에 위치한 왜성은 유정.권율 이 이끄는 육군 3만6천, 진린,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 1만 5천병력이 왜성을 비롯 장도등을 오가며 왜군을 격멸했고, 충무공 이순신이 27일간 머물면서 전사 하루 전, 소서행장을 노량 앞바다로 유인하여 대첩을 거둔 유서 깊은 전적지였다 한다. 420여년전 침략자 왜놈들의 대륙 찬탈을 위한 엄청난 야욕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소름돋게 하는 아픈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고, 먹먹한 가슴을 안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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