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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의 동학과 한말 항일의병, 義인가? 忠인가?세밑에 펼쳐진 3917마중 인문학콘서트 눈길
정찬용 기자  |  najunews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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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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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가 없으면 호남이 없고 호남이 없으면 국가가 크게 흔들린다
(無羅州 無湖南 無湖南 則擧國將震盪)

동학농민전쟁 당시 전라도 53개 군현 가운데 유일하게 동학군을 막아 낸 나주 서성문 전투의 수성군과 향리들이 호남 유일의 의병을 일으킨 과정을 통해 義와 忠의 의미를 되집어 보고 나주정신의 근본을 찾아 보고자 복합문화공간 3917 마중(대표 남우진)이 기획한 나주의 동학과 한말 항일 의병, 義인가? 忠인가? 인문학 콘서트가 김평호 나주향교 전교, 송일준 광주mbc 사장, 나천수 문학박사, 정관채 염색장 전수관장, 박경중 (전)나주문화원장, 나기철 (전)나주투데이 대표, 이영기 (전)나주시 의원, 나종석 (전)나주시의회 의장, 이계표 전라남도 문화재위원, 윤여정 향토사학자를 비롯한 30여명의 나주인이 참석한 가운데 12월 27일 오후 1시 30분 부터 나주시 향교길 3917마중 목서원에서 열렸다.

돈차 전문가인 소담 김종덕박사의 돈차 시음회와 함께 한 이날 콘서트는 전라도 동학과 항일의병 연구의 권위자인 홍영기 순천대 사학과 교수를 초청하여 이계표가 묻고, 홍영기가 답하는 형식으로 진행되었다.

이계표 전문위원은 나주는 18세기 중엽 이중환의 택리지에 의하면, 북서쪽으로는 금성산이 막고 있고 남동쪽 으로는 영산강이 둘러져 있어 자연지세가 천혜의 요새였다고 말하고,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겪은 나주 선비 겸산 이병수는 그의 저서 겸산유고(謙山遺稿)에서 나주가 없으면 호남이 없고 호남이 없으면 국가가 크게 흔들린다(無羅州 無湖南 無湖南 則擧國將震盪)고 나주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말을 설명하였다.

이날 콘서트에서 홍영기 교수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중에 전라도의 수부 전주성을 점령하는 등 곳곳에서 연전연승하던 동학군이 전라도 53개 군현 가운데 나주성 만을 점령하지 못하고, 나주 서성문 전투를 비롯해 나주 전역에서 연전연패했던 것과 나주의 수성군이 기세당당한 동학군에게 나주읍성을 지켜내고 성밖 여러 전투에서 동학군을 진압했는지 고지도를 통해 자세히 설명하며 다른 큰 고을의 향리가 대개 70여명인 것에 반해 270여명에 달했던 나주 향리와 일가 권속, 사병까지 수천명의 병력, 다른 지방 수령들과 달리 지역의 신망이 높았던 민종렬 목사의 치정들을 나주 수성의 원인으로 꼽았다.

이런 승전으로 군공을 세운 수성군 도통장 정석진, 목사 민종렬 등 여러 향리들이 갑오군공록(甲午軍功錄)에 수록돼 있다 하였다. 나주성을 수호한 정석진은 그 공로로 해남군수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계속해서 홍교수는 “김홍집 내각의 집권과 갑오경장의 실시로 개화파가 득세하고, 개화파 관료 참서관 안종수가 나주에 부임해서 업무조정과 과감한 단발령을 실시하고, 행정실무에서 갑자기 해고 당해 기득권을 박탈당한 불만 등이 표출되어 이들은 친일관료 안종수를 처단하고 항일의병의 기치를 들어 전라도 최초의 항일의병이 나주에서 시작되었으며, 노사 기정진의 손자 송사 기우만이 이끄는 장성의병이 나주에 와서 나주의병과 나란히 임란 의병장 김천일의 사우 옛터에 고하고 금성산 산신을 모시는 금성당서 제사를 모시는 등 나주의 전통을 되살려 시대적 난제를 해결하기 위한 의병운동을 조직적 으로 펼쳐나갔다” 하였다.

이계표 전문위원은 “15세기 후반에 집필되서 16세기 중반에 고쳐진, 조선 초기와 중기에 걸친 상황을 잘 알려주는 최고의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전라도의 거읍(큰도시)으로 전주·남원·나주 세 곳을 들고 있으며, 1895년 조선 8도를 23부로 하는 지방제도 개편시에 나주관찰부로 삼았고, 1896년 남북도제를 시행할 때도 나주에 전남관찰부를 두고 있어 행정적인 격이 지역의 여타도시와 비교되지 않는 품격높은 도시였다고 이해된다. 고려 현종대 이후 천년간 나주목이었다가 근대에 그 격이 더욱 높아졌으니 나주인의 배타적 자존심의 근저를 알만하다”고 나주정신의 근간을 설명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은 두 차례의 대규모 서성문 공성전에서 3000여명의 사상자만 남긴 채 물러섰다. 농민군의 예봉이 꺾이자 관군은 나주에 토벌사령부를 설치하고, 일본군의 지원을 받으며 영암, 강진, 해남, 보성 일대를 뒤쫓으며 농민군을 토벌했다. 그해 겨울 잡혀온 농민군은 남고문 밖 전라우영 (지금의 나주초)에 투옥됐다가 처형됐다. 녹두장군 전봉준도 그해 12월 순창에서 체포돼 나주로 끌려왔다 이후 경성으로 압송되어 일제에 의해 처형되었다.

농민군을 격퇴했던 수성군 지휘부도 온전하지 못했다. 을미년 일제 낭인에 의해 저질러진 명성황후 시해와 일제의 압력 속에서 내려진 단발령에 나주에서 전라도 최초의 을미의병이 봉기했다. 모의가 이루어진 곳도 서성문 밖 나주향교였다. 배후엔 향리들의 대부격인 수성군 대장 (도총장) 정석진과, 토벌대장(초토사) 민종렬이 있었다.

정석진은 수성의 공로로 해남군수로 제수된 터였다. 1896년 2월 해남 임지로 떠나는 정석진을 배웅한 유림과 향리들은 읍성으로 돌아와 일제에 부역하며 단발을 강제하던 부관찰사 안종수와 부패 관리 3명을 처단했다.

그러나 이들은 관군에 곧 진압되고 정석진과 김창균 등 주동자는 전라우영 무학당 뜰에서 참수됐다. 1년 전 농민군이 처형된 곳이었다. 그렇게 농민군과 수성군은 형장에서 피를 섞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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