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 정 : 문화재자료 제175호
소재지 : 나주시 과원동 109-5
지정일 : 1990년 2월 24일
규 모 : 높이 190㎝, 너비 58㎝,두께 19㎝
금성토평비는 고종 31년(1894)의 동학농민운동 때 동학군과 싸워 나주성을 수성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895년 세웠다. 본래는 나주목 내의 정수루(正綏樓) 앞에 세워졌으나 1930년 금성관 앞으로 옮겼고, 1976년 현 위치로 옮긴 것이다.
비문의 내용은 먼저 갑오농민항쟁이 일어나면서 나주에까지 농민군이 들어오게 되는 과정을 간략히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후 유학을 장려하고 충효를 강조해왔던 민종열 목사가 여러 장수들을 지휘, 치밀한 방어 계획을 세우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
끝으로 관군과 동학군이 나주목 내에서 직접 접전하는 과정을 비교적 자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한편 이 토평비의 건립과정은 관련자료가 없고 비문 속에서도 이를 명쾌하게 언급하지 않아서 자세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이 비문을 지은 송사 기우만(松沙 奇宇萬)이 한말 이 지방에서 이름난 유림인 것을 감안할 때 농민군과 상반된 세력인 유림들의 발의로 이루어졌음은 충분히 예견된다
현재 이 비는 다른 선정비들과 함께 위치하고 있으며, 비명은 「금성토평비」, 비문은 기우만이 찬(撰)하고 송재회가 글을 썼던 것으로 동학군의 항쟁에 대응하여 국가에 충절을 보인 나주목 내의 관군이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선의 유교가치관이 남아 있던 당시만 해도 그 의미는 컸을 것이다. 그러나 동학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이 재조명되는 현재의 상황에서 그 의미나 가치는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동학항쟁 당시 나주를 중심으로한 호남지방에서의 역사적 사실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록한 사료라는 점에서 그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