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복암리 고분

  • 입력 2006.11.14 13:38
  • 기자명 예스TV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종  목 : 사적 제404호
소재지 :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 873-17 외
지정일 : 1998년 1월 5일
규  모 : 4기(면적25,090㎡) 3기 복원

복암리 서쪽의 낮은 구릉에 분포되어 있는 4기의 삼국시대(三國時代) 고분이다. 이 일대는 영산강의 지류를 낀 구릉지대로서 원래 3기 정도가 더 있었으나 30여년전 경지정리시 삭평되었다. 1·2호분은 1995년 정비복원을 위한 기초조사를 통해 정확한 형태와 규모가 파악된 후 복원되었으며 3호분은 1996년부터 1998년까지 국립문화재연구소와 전남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3호분에서는 22기의 옹관(甕棺)과 1기의 석곽옹관(石槨甕棺), 1기의 횡구식석곽(橫口式石槨), 3기의 수혈식석곽(竪穴式石槨), 11기의 횡혈식석실(橫穴式石室), 2기의 횡구식석실(橫口式石室), 1기의 목관(木棺) 등 영산강유역에서 나타날 수 있는 모든 형태의 묘제가 망라된 41기(분구조영 이후의 무덤수는 28기)의 매장시설이 확인되었다.   
아울러 금동신발과 은제관식(銀製冠飾), 큰칼(은장삼엽환두대도, 규두대도)·금귀고리 등 다양하면서도 최고의 권위를 상징하는 유물들이 출토되었다. 3호분에서 이와같이 다양한 유물이 출토된 것은 전혀 도굴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복암리 3호분은 전용옹관 중에서 이른시기(3세기대)에 해당하는 것이 있고, 횡혈식석실분 중에는 7세기 전반까지 내려오는 것이 있어 전체적으로 400여년간 사용된 고분으로 중심조영 연대는 5세기 후반 ∼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된다. 이 고분은 당시 토착 마한(馬韓) 세력에 의해 조성된 집단묘인데 특히 1996년에 조사된 한 석실(石室)에서는 4기의 옹관이 출토됨으로써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중엽에 걸치는 영산강유역 초기석실분의 피장자는 옹관을 썼던 기존의 세력자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는 영산강유역의 고대문화를 연구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사실로서 영산강유역의 초기석실분과는 전혀 다른 백제(百濟) 계통의 후기석실분이 들어오고 은제관식이 출토되기 시작하는 6세기 중엽경까지는 기존의 마한 집단이 독립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인근의 회진리에 위치한 회진성(會津城 전라남도 기념물 제87호)은 바로 이 복암리고분군을 축조한 집단에 의해 사용되었던 성곽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복암리 고분은 다양한 묘제가 복합된 국내 유일의 고분으로 영산강유역의 고분에서 나타나는 다장(多葬)과 대형분구의 성토방법 과정 연구, 각묘제간의 관계, 옹관묘와 석실분 자체의 변천과정 연구의 표본적 자료 제공, 매장방법 및 부장(副葬) 유물연구의 기준제공, 일본관의 관계, 영산강유역의 토착세력과 백제와의 관계 연구의 결정적 자료 제공등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이 지역의 고대사를 규명하는데 대단히 중요한 고분이다.

나주 복암리 고분

나주 복암리 고분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