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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백호 임제선생 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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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0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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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 임제 선생은 조선 명종 4년(1549) 12월 20일 병마절도사인 부친 임진과 모친남원 윤씨의 5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백호라는 호 외에 겸재, 풍란, 소치라고도 불렸다. 1576년 생원 진사에 합격하여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정랑을 지냈으나 선비들이 동, 서로 나뉘어 다투는 것을 개탄하여 명산에 들어가 성운에게 사사했다. 성운 선생은 서경덕, 조식, 토정 이지함 등에게 성리학을 가르치신 분이다.

당시 공명심에 불탔던 호남 선비들이 당대의 등용문이던 박순의 문하로 운집할 때 과학 위주의 글에는 관심이 없었던 호쾌한 백호는
성운을 홀로 찾았다. 그의 나이 26세 가을이었다. 3년을 그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영모정, 벽루정, 소요정, 창랑정
등 이른바 영산강 8정을 두구 돌아다니며 문우들과 만나 술과 시, 거문고 풍류로 세상 인심을 논했다.

27세때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7년 전인 1575년 호남에 왜구가 침입하자 백호는 박계현 막하에서 백의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후에
병조판서가 된 박계현이 임제를 평하기를  '금석같은 목소리, 유창한 말솜씨, 노년에 그대 만나 사는 보람 크도다. 시단의 굳센 시운
세상을 압도하니...' 라 하였다.
30세 후 민중 속에 뿌리깊은 서민 의식 표층의 시를 많이 남겼고, 39세로 요절할 때까지 일천 수가 넘는 시를 썼다.
대문호 신흠은 '백호문집' 서문에서 "내가 백사 이항복과 만나 임백호를 논하기 여러번인데 매양기남아로 일컬었고, 또 시에 있어서
그에게 90리나 훨씬 떨어져 양보할 수 밖에 없다" 고 털어 놓았을 정도이다.
백호가 운명하기 직전 남긴 유언에 "나라마다 독립 국가를 자처하나 오직 우리 나라만 중국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구나"
하는 말이 있다. 유언의 사실 여부를 떠나 마지막 남긴 서러운 말은 민중들의 가슴 속에 '독립심'과 '자주의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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