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 교수의 문화유산탐방

이정호 교수의 문화유산탐방

  • 입력 2006.04.24 14:41
  • 기자명 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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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대 영산강유역과 백제



6세기 중반, 고대 영산강유역에 갑자기 새로운 분묘가 등장한다.

수장세력 분묘는 전통적으로 대형옹관고분과 토착적인 돌방무덤을 사용하여 왔다.

그러나 갑자기 백제 사비시대의 굴방식 돌방무덤으로 바뀐 것이다.

이 고분은 백제가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근거지를 옮긴 후에 새로이 등장하는 무덤양식이다.



나주에서 이 돌방무덤은 다시면 복암리를 비롯하여 영동리, 반남 흥덕리, 덕산리 등지에 발굴되었다.

그리고 이 고분에서는‘왕은 검은 비단으로 만든 관에 금꽃을 장식하고 군신 특히 육품 나솔(奈率)이상은 은꽃으로 장식한다’는 고대 백제기록과 일치하는 은제관식이 출토되었다.



고분 피장자가 백제의 관등제에 속했던 인물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고고학 자료를 통해, 이 시기에는 영산강유역이 백제에 완전히 복속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역사적으로 백제가 왕족을 지방관으로 파견하여 지배하는‘담로제’가 시행되었다고 보고 있다. 그런데 최근 발굴된 유적들은 백제가 영산강유역을 직접 지배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던지게 한다.



백제의 무덤을 보자. 백제의 굴방식 돌무덤은 기본적으로 단독장이거나 부부합장묘이다. 백제 무령왕릉은 무령왕과 왕비의 합장묘로써 대표적인 백제 장제(葬制)를 보여주고 있다.



반면 영산강유역의 돌방무덤은 2인 이상이 한 돌방 안에 안치한 다장제(多葬制) 풍습을 보인다. 이미 수년전에 국립문화재연구소가 발굴한 복암리고분에서도 다장제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고, 최근 새로이 발굴된 다시 영동리고분에서는 다장제 풍습을 적나라하게 보여 주고 있다.



영동리고분은 한 무덤 안에 다수의 돌방을 축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한 돌방 안에는 5명에 이르는 다수의 피장자를 안치하였다. 외형은 백제의 무덤과 유사하나 무덤 내부에 시행되는 장제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영산강유역에서 다장제는 이미 3세기부터 나타난다. 그리고 영산강세력이 가장 강성했던 5세기 반남 신촌리 9호분에는 한 무덤 안에 무려 12명 이상의 피장자를 안치하기도 하였다.



고대 영산강유역이 백제와 다른, 매우 특징적인 문화를 영위하였다고 말하는 근거 중에 하나가 이 다장제였다. 다장제의 전통, 이러한 장제는 당시의 관습이나 종교, 규제 등 무형의 사회적 규범에 구속되어 이행된 결과이다. 따라서‘무덤형식 또는 무덤양식의 변화’라는 외형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단일한 장제장법이 시행된다면, 그것은 피장자가 전통적인 장제를 가진 토착세력이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비록 영산강유역이 백제의 영토로 흡수되고 있었지만, 실질적인 지배는 기존의 대형옹관고분세력을 계승한 토착세력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백제가 지방을 통치하기 위해 시행된 ‘담로제’는 영산강유역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했거나, 행정편제는 시행되었더라도 실질적인 지배력까지 거두어가지 못했다. 영산강유역의 고대세력은 때로는 독립적으로, 그리고 때로는 백제와 타협하여 정치적 관계를 맺어 가면서 수세기동안 독자적인 지배력을 유지해 나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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