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 교수의 문화유산탐방

이정호 교수의 문화유산탐방

  • 입력 2005.11.04 14:41
  • 기자명 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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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강 고분과 임나일본부설 ②



고대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은 학계의 강한 비판이 있으나 일본 학계에서는 기본 골격으로써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이 사실이다.

일제의 임나일본부설에 대한 집착은 일제강압기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반영된다. 조선총독부는 산하에 고적조사위원회를 설치하여 조선고적조사 5개년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다고 믿었던 가야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고고학적 조사를 벌였다. 임나일본부의 증거를 찾아 나선 것이다.

한편 고적조사위원회는 영산강유역의 고분에도 주목하였다.

사실, 영산강유역에 대한 조사가 가야지역과 달리 임나일본부의 증거보다는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과정에서 반드시 시행되는 문화침략의 소재 마련이라는 측면이 강했다.

1917년부터 시작된 나주 반남고분에 대한 조사에서는 일본계 유물이 몇 점 발견되었다.

일본 고대 유적인 전방후원분에 장식된 원통형토기(일본명 : 하니와), 칼자루에 사용하는 기하학적인 문양의 장식물(직호문 칼자루장식) 등이 그것이다.

더불어 당시까지만 해도 역사적으로도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백제지역임에도 불구하고 백제와 전혀 다른 옹관고분이 발견되었다.

조사 결과는 영산강유역의 고분이 임나일본부를 입증하기에 호재였을 수도 있으나 직접적인 증거로써 활용되지 못했다.

당시 발간된 보고서는 왜인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고 모호하게 결론짓고 만다.

이는 임나일본부설이 지닌 태생적 한계 때문이었다.

임나일본부가 가야지역에 설치되었다는 믿음으로 인해, 가야지역 이외에서 출토되는 일본계유물에 대해 (왜곡을 위해) 적극적으로 해석할 기회를 빼앗아버린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결론을 곰곰히 짚어보면 임나일본부설과 맥을 같이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일본이 본격적으로 조선 강점을 시작한 시기, 일본 역사지리학회 기관지인 〈역사지리〉는 기다 사다기치 등 당시 일본의 역사학자 대부분을 동원해 임시증간호로서 조선호를 발간하였다.

그들이 쓴 글은 모두 동조론을 근거로 일본의 조선합병을 예찬한 것이었다.

그 중심적 인물인 기다 사다기치는 〈일본민족이란 어떤 것인가?〉〈한국민족이란 어떤 것인가?〉〈한국병합과 역사〉 등의 글을 통해 일선동조론에 대하여 강하게 부각시켰다.

그리고 〈동원〉이라는 잡지에서는 〈일선양민족동원론의 경개〉, 〈민족과 역사〉라는 잡지에서는 〈일선양민족동원론〉이라는 글을 차례로 발표했다.

이렇듯 일본 역사계에서는 소위 일선동조론이 크게 힘을 얻고 있었고, 유물·언어·신화·풍습 등 다방면의 근거를 들면서 조선과 일본의 양 민족이 동원(同源)·동종(同種)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었다.

결국 일본과 조선이 같은 조상으로부터 피를 나눈 근친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조선과 일본은 외국·외민족이라고 볼 수 없으며, 역사적으로 이렇듯 명분이 있기 때문에 일본에 의한 조선의 지배가 정당하다는 이론적인 근거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일선동조론을 실체화하기 위해 짜낸 것이 바로 임나일본부였고, 조선총독부는 이를 입증하기 위해 가야지역에 대한 집중적인 조사를 시행했으나 크게 성과를 얻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반남고분에서 일본계 유물이 발견되고, 이 유물을 임나일본부설에 직접적으로 적용하기 힘들자 그 모태이론인 일선동조론의 틀을 동원하여 결론을 짓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반남고분이 ‘왜인의 무덤일 가능성이 있다’는 보고서의 내용은 일제의 식민지 역사왜곡을 염두에 둔 것이며, 나아가 임나일본부설을 대체할 수 있는 후대의 잠재적인 역사왜곡의 재료로써 남겨진 것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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