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권침탈 울분 토하며 의병활동 나선 조기보

국권침탈 울분 토하며 의병활동 나선 조기보

  • 입력 2006.08.21 14:44
  • 기자명 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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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흥, 영암, 강진, 나주 누비며 혁혁한 공 세워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국내의 반일열기는 고조되었다. 11월 20일 장지연(張志淵)이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통해 일제의 침략성과 조약에 조인한 매국 대신들을 통렬히 비판한 데 이어, 유생들과 전직·현직 관료들이 을사5적의 처단과 조약파기를 주청하는 상소가 이어졌다.



나주에서도 세지면 내정리 조기보 선생이 국권침탈의 울분을 토하며 뜻 있는 주민 몇 명과 함께 항일의병 항쟁을 전개했다.



그는“차리리 싸워 죽을지언정 어찌 적국을 섬길 수 있느냐”며 8살의 어린 아들을 남기고 의열투쟁에 나섰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될 당시에는 내정마을 야산에 몸을 숨긴 뒤 산발적인 게릴라 전략으로 일본 헌병을 교란했으며, 이후 함평출신 심남일 의병장과 함께 장흥, 영암, 나주, 강진을 누비며 혁혁한 공을 세웠다.



하루는 을사조약이 체결된 뒤 마을에 헌병 2명이 말을 타고 들어왔다. 멀리 야산에서 조기보 선생은 이들의 행동을 예의 주시했다.



마을 저수지에 노닐고 있는 오리를 잡기 위해 일본 헌병은 방아쇠를 당겼다. 운 좋게 2∼3마리가 총에 맞아 저수지 한 가운데에 둥둥 떠 있었다.



칼바람이 휘몰아치던 날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헌병 2명은 옷과 총을 내려놓은 채 오리를 건지기 위해 저수지로 들어갔다.



이를 지켜보던 조기보 선생은 이들의 옷과 총을 들고 줄행랑을 쳤다. 그 자리에서 일본 헌병을 향해 총구를 겨냥해 사살하고 싶은 마음이 충동 쳤지만 마을 주민들이 뒤에 당해야할 고통을 생각해 꾹꾹 참았던 것이다. 의병활동에 나선 첫 성과였다.



▶ 영암 사촌전 전투에서 일본군

▶ 20여명 사살 뒤 숨져



며칠 뒤 이 사건으로 인해 마을 주민들이 나주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연행될 당시 상투를 굴비 역듯 묶어 일본 헌병이 끌고 갔을 정도로 그들의 분노는 하늘을 질렀다. 만에 하나 그가 헌병을 살해했다면 아마 피비린내 나는 참상극이 벌어졌을 것이다.



이후 일본 헌병대 소대가 마을로 들어온 다는 소식을 접한 조기보 부대는 대나무 밭에서 숨어서 첫 결전을 기다렸다.



헌병대 또한 조기보 부대가 마을 대나무 밭에서 숨어 있을 것으로 여기고 그곳을 향해 진격해 왔다. 10여분간 귀를 찢는 듯한 총성이 오고갔다.



그의 부대 대원들도 총에 맞아 전사했고 헌병 3∼4명도 그 자리에서 숨졌다. 마을 전투에서 자신을 갖게 된 그는 함평 심대장 부대에 예속되어 활동하게 된다.



그가 숨지기 전날 영산포에서 영암 사촌전으로 일본 기병 20명을 거느리고 온 다는 소식을 듣고 산속에 매복했다. 사정거리 안으로 일본군이 들어오자 포를 싸 유인한 조기보 부대는 부대를 반으로 나눠 후방으로 빠져 고립시킨 뒤 외장 금평산과 기병 10여명을 죽이고 무기를 탈취하는 전과를 세웠다.



이에 앞서 그는 강진 오치동과 장흥 곽암, 남평 장담원, 능주 노구도 등에서 일본군와 맞서 싸웠다. 운명의 그날. 1908년 음력 8월 1일. 지금의 영암 반치산에서 일본군 40명과 싸워 20여명을 죽이는 전과를 올렸지만 그도 그 자리에서 숨졌다.



▶ 전 농민회장 이득선씨

▶ 추모비 건립 준비



3대 독자인 그가 8살의 아들을 남겨놓고 전장으로 달려갔던 데는“백성이 있고 역사가 있는 나라라면 어찌 국민의 항쟁이 없겠는가”라는 애국심 때문이었다. 1945년 광복후 전남지사로부터 공훈을 표창한 뒤 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 받았다.



조기보 선생의 나라사랑이 컸던 만큼 그에 대한 기억을 후손들에게 알리기 위해 세지면 내정리 이득선 전 농민회장(83)이 추모비를 세우기 위해 발 벗고 나서고 있다.



이 회장은“조국을 지키기 위해 순국하셨는데도 후손이 가난해 조그마한 비 하나도 세우지도 못하는 안타까운 실정”이라며“그의 충절을 우리 후대사람들이 본받기 위해 하루빨리 비를 세웠으면 한다”고 말했다.



※ (나주투데이 공동취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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