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함평 사포나루에서 탐사가 끝이 나지만 농사철 지류에 있는 댐과 저수지에서 농업용수 배수를 늘려 수량이 풍부해진 뱃길을 따라 회진까지 약 3시간 정도의 시간을 항해했다.
뱃길 이야기꾼(김경수 - 영산강뱃길 삼백오십리 저자, 지리학자)에게 경유지의 지명과 강의 이름에 대한 설명을 들으며 사먹사먹 강의 흐름을 거슬러 올라갔다.
처음 시작한 영산강 하구언은 말 그대로 방조제가 1981년 완공돼 현재는 영산호라 불린다.
영산호는 3,460ha의 면적에 총 2억5천3백만 톤의 담수를 지닌 호수가 됐다. 현재는 관광지로 개발됐다.
다음 무안 남악리는 현재 도청이 들어서고 있다. 이곳의 대죽도와 소죽도는 현재 땅위의 섬이 됐는데 이곳 시누대는 군용 화살로 쓰였다 한다.
무안 일로음 청호리의 상사바위 전설은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대한 비극을 간직하고 있다.
머슴 총각이 주인집 딸을 짝사랑하다가 상사병에 걸려 식음을 전폐하다 그만 죽어 구렁이가 되고 말았다. 구렁이는 머리는 머슴의 얼굴이었고 몸은 구렁이였다.
이 구렁이는 아침마다 아가씨 방 앞에 또아리를 틀고 아가씨를 지켜봤다.
이런 모습이 아가씨에겐 머슴으로만 보였다. 동네 사람들은 그것이 상서롭지 못하다 여겨 결국 그 둘을 다 죽이기로 결정한다.
사람들은 우선 상사바위 동굴입구 양쪽 바위에 밧줄을 묶고 아가씨를 담은 바구니를 매달아 놓았다. 이를 지켜본 구렁이는 밧줄을 타고 아가씨를 구하기 위해 그 바구니 안으로 들어갔다. 그 때 줄을 잘라 그 둘을 주룡 협곡에 빠트려 죽였다.
신분차이 때문에 이루지 못한 사랑은 오늘날도 상사바위에 생생히 남아있다.
상사바위와 주룡포를 지나 멍수바위가 나왔다. 원래 방조제가 없었을 때엔 조수가 밀려오면 물속에 가라앉는 바위다. 이곳 또한 어머니와 아들의 전설이 묻어있다.
이곳은 옛날 바위에 서식하는 굴이 지천으로 널린 곳이었다. 굴을 따고 물이 차오르기 전에 온다던 멍수를 기다리던 어머니는 그가 나타나지 않자 점점 불어오른 강물에 점점 더 서있을 곳을 잃어가기 시작하자“멍수야! 멍수야!”라고 목청껏 그를 불렀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아 물어 빠져 죽었다.
곧 멍수가 그곳에 도착해 보니 이미 강물에 바위는 잠겨 더 이상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멍수는 어머니를 부르며 울부짖지만 강은 어머니를 내놓지 않았다.
멍수는 슬픔에 잠겨 끼니도 거르면서 날마다 그곳에 나가 어머니를 애타게 부르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그를 기려 이곳을 멍수바위라 명명했다. 현재는 일제시대 때 세운 등대가 있으며 갈매기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멍수바위를 지나 양호도에 도착했다. 이 섬은 영암 시종면에 속했다가 지금은 무안군에 소속됐다. 예전 나주, 무안, 영암의 경계가 됐던 섬이었다.
양호도는 과거 일제시대에 일본이 영산강의 하구 기점으로 정했던 곳이었다. 이 때에 측정한 강의 길이가 약 300리였다. 현재 하구언이 기점이 돼 지금은 약 350리로 보고 있다. 한 때 어업이 중심을 이뤘으나 지금은 쇠퇴해 주민들은 거의 뭍으로 이주했다.
다음은 동강 몽탄나루와 몽탄대교에 도착했다. 몽탄이라는 지명은 고려 태조와 관련이 있다.
고려태조의 꿈에 신령이 나타나 강을 건너라해서 강을 건너고 견훤을 격파했다. 그 후 이곳을 몽탄이라 불렀으며 파군천도 이곳에 있다.
이 지역은 예전 영산지중해 또는 남해만이었지만 지금은 조수의 출입이 없어 좁은 강줄기로 변했다. 장어 등 각종 해산물이 풍부해 유명한 곳이었으나 드넓은 바다와 갯벌은 논경지로 개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