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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호국인물로 선정된 김천일 의병장을 추모하는 현양행사가 지난 8일 후손을 비롯한 종중과 유관단체 주요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쟁기념관 호국추모실에서 거행됐다.전쟁기념관(관장 박익순)은 지난달 30일 임진왜란 당시 호남지역에서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킨 김천일(金千鎰) 의병장을 2004년‘1 월의 호국인물’로 선정한 바 있다.1537년 전남 나주에서 태어난 김의병장은 1573년‘군기사주부’(軍紀寺主簿)의 직위로 관직에 진출한 뒤 강원도·경상도 도사, 담양 부사, 한성부서윤, 수원 부사 등 직위를 역임했다. 그러나 1589년 수원 부사 재직시 권세있는 양반가의 탈세를 문제 삼았다가 모함을 받고 벼슬을 그만두었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경명, 박광옥, 최경회 등과 함께 호남지역 최초로 의병을 일으켰고 나주에서 조직한 의병 300명을 이끌고 서울로 진군했다. 김의병장은 수원 지역에서 유격전을 벌여 첫 전투에서 통쾌한 승리를 거뒀고 강화도로 이동, 왜적을 섬멸한 공로로 선조로부터‘창의사(倡義使)’라는 군호가 내려졌다. 그는 이후 양천과 김포·양화도 전투에서 대승을 거뒀으며, 남하하는 왜군에 의해 진주가 위태롭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성으로 병력을 이동시켰다. 김의병장은 1593년 6월 합세한 관군을 포함한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왜군 10만 명과 9일 동안 100여 차례 전투를 벌이던 중 성이 함락되자 큰아들과 함께 남강에 몸을 던져 순국했다. 김의병장은 그의 사후 공적을 인정받아 1603년 좌찬성에, 1618년 영의정에 각각 추증됐고 1627년‘문열공(文烈公)’이라는 시호를 제수받았다. 나주의 정렬사, 진주의 창렬사, 순창의 화산서원, 태인의 남고서원, 임실의 학정서원 등에 제향(祭享)되었다. 저서로는『송천집 松川集』『健齋集 건재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