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박공근 선생, 독립유공자 지정

독립운동가 박공근 선생, 독립유공자 지정

  • 입력 2004.08.09 14:50
  • 기자명 취재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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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회 나주지회 발회식 모습. 앞 줄 왼쪽에서 세번째가 박공근 선생.



올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 수여



독립운동가 故 박공근(1901∼1960)선생이 타계한 지 44년만에 독립유공자로 지정을 받아 올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됐다.



故 박공근 선생은 우리 민족사의 암울했던 시기인 일제 강점기에 효종단, 나주청년회, 나주청년동맹, 신간회, 협동상회 등의 항일사업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으며, 특히 나주 청년학생들의 1929년 11월 27일 독립만세시위 사건을 배후에서 지도했던 인물로 시위 후에 광주지방법원으로부터 징역 1년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른 바 있다.



그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의 가장 직접적인 시발점이 되었던 10월 30일 나주역 사건으로부터 11월 3일 광주만세시위 이후, 나주농업보습학교와 나주보통학교 학생들을 조직하여 11월 27일의 만세시위를 지도한 지도자였다.



11월 11일부터 26일까지 16일간의 긴 준비기간 동안 10여명의 주동학생들과 함께 여섯 차례에 걸쳐 회합을 가지면서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면서 격문을 인쇄하고 수백 명의 학생을 상대로 시위 참가를 권유하도록 지도함으로써 학생들의 만세시위가 단순한 불만에서 촉발된 것이 아니라 철저한 조직과 보안유지 속에서 이루어졌음을 증명해주었다.



당시 경찰에서는 인쇄를 할 수 있는 기자재가 충분치 못하였고 또한 어디에서 보유하고 있는지 전부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등사기와 인쇄할 종이, 잉크 등을 경찰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들여와서 격문을 인쇄하였고, 나주장날인 27일의 거사를 해낼 수 있었다.



11월 27일의 시위 진행과정을 보면 나주보통학교에서 정오를 알리는 종소리를 신호로 2백여명의 학생들이 교문 밖에 집합하여 농업보습학교 학생 50여명과 합류하여 조선독립만세를 삼창하고 남문정(南門町)에 이르러 급거 출동한 경찰 1백여명이 포위하려고 하자 농업보습학교 학생 유찬옥의 고함에 따라 2개열로 나누어 각기 다른 방향으로 행진하는 의외의 전술을 구사하여 협동상회(현재의 나주택시 앞)앞으로 진출하였다.



학생들은 곧 이어 나주오일장으로 들어가서 격문을 뿌리며 장에 모였던 모든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목청껏 외쳤던 것이다.



경찰은 응원대까지 동원하여 나주오일장을 포위하였으나 학생들은 대열을 정리하여 경찰이 없는 쪽으로 시장을 탈출하여 시장 밖에서 격문을 뿌리며 만세시위를 계속하다가 경찰의 포위로 인근 가정으로 모두 담을 넘어 도망을 하였고, 시민들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경찰의 가택수색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는 50여명의 학생들만 검거되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경찰을 어린 학생들이 따돌리고 몇 번에 걸쳐 포위를 뚫고 격문을 뿌리면서 2km의 시위 행진을 했으며 시민들의 완벽한 도움을 이끌어내면서 나주 학생의 항일 정신을 마음껏 드러낸 이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박공근 선생의 지도 아래 이루어진 일이었다.



박공근 선생은 이 만세시위 사건으로 투옥된 뒤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르고 이후 해방이 될 때까지 시국이 불안할 때마다 예비검속자 명단에 포함되어 큰 고통을 당하였다.



국가보훈처에서는 선생이 광주학생독립운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8월 15일 광복절 59주년 기념식장에서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키로 결정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나주 만세시위 운동과 관련하여 광주지방법원으로부터 형을 받은 사람은 모두 네 사람으로, 박공근 징역 1년, 양영택·유찬옥·박동희 징역 10월, 홍민후 징역 8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한편 박공근 선생의 장남 박화담(70) 씨는 현재 세지면에 본사를 둔 ㅅ건설회사의 대표이사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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