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 교수의 문화유산탐방

▶ 영산강유역의 신라토기

  • 입력 2007.05.21 11:12
  • 기자명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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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발굴조사 된 나주 다시면 영동리 초동마을의 폐고분(廢古墳)에 대해 사적지정을 위한 절차를 거치고 있다. 삼국시대인 기원 300년~600년 사이에 만들어진 이 고분은 오랜 세월동안 농지로 이용되면서 형체를 거의 잃어버리고 너비 20m 정도의 작은 봉분 흔적만 남아 있었다.

이미 심하게 훼손된 채 버려진 고분이었지만 일부나마 남아 있을지 모를 연구자료라도 확보하기 위해 연구조사를 시행한 결과 뜻밖의 유적이 확인되었다.

먼저, 고분 안에서는 모두 40여개의 옹관(甕棺)과 돌방(石室)이 드러났고, 그 중 돌방 안에는 각각 2~4구의 인골(人骨)이 안치되어, 지금까지 모두 20여개체 이상의 고대인골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미처 조사하지 못한 봉분의 다른 부분에서도 옹관과 돌방이 다수 존재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영동리고분은 한 고분 안에 다수의 매장시설이 확인되는 사례로써 흥미로울 뿐만 아니라, 1500년의 세월동안 제 모습을 남기고 있는 인골이 다량으로 출토된 사례로써 보기드문 발굴성과였다. 이처럼 많은 인골이 확인됨으로써, 당시 사람들의 외형적 모습뿐만 아니라 그들의 식생활, 가족관계, 평소 앓고 있었던 지병, 평균수명 등 다양한 고대사회의 복원자료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발굴조사가 계속 진행됨에 따라 다량의 인골과 더불어 뜻밖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5세기말~6세기 전반의 돌방무덤에서 다수의 신라토기가 확인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 지역에서 신라계의 토기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이 출토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했으니 신라문물이 각 지에 파급되었고, 영산강유역에서도 이 시대 유물이 출토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영동리고분군처럼 삼국이 병립하던 시대의 신라토기가 출토된 것은 처음이다.

신라토기는 모두 5점이 출토되었다. 이 토기들은 횡혈식석실고분의 입구에서 장례의식을 치룬 후 매납한 토기무리 중에서 출토되었다. 마치 토기 박람회처럼 신라토기와 함께 영산강 세력의 토착토기, 백제의 세발달린 접시(삼족기), 고대 일본의 왜계토기가 함께 무리지어 출토되었다. 이 고분의 피장자가 백제, 신라, 왜와 긴밀하게 관계를 유지하던 인물임에 틀림없다.

영산강유역에서 신라유물이 출토된 사례는 나주 복암리고분군(사적404호)의 말 재갈과 행엽 등이 있다. 복암리고분군 발굴 당시에는 이 유물을 통해 고대 영산강세력과 신라가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후속되는 자료가 부족하여 단지 추측해 보는 정도에 그쳤다. 그런데 이번에 신라 토기가 다수 확인됨으로써 고대 영산강세력과 신라의 관계를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실마리가 된 것이다.

475년, 백제는 고구려 장수왕의 공격을 받자 당시 동맹관계였던 신라에서 1만 원군이 파병된다. 그러나 이미 백제는 고구려에 패퇴하여 한강유역의 위례성을 점령당하였고 불가피하게 웅진으로 수도를 이전하게 된다. 이후 고구려의 남진에 대처하기 위해 493년(백제 동성왕)에 신라와 국혼을 하고 고구려에 대한 공수동맹을 맺는 등 기존의 동맹관계를 훨씬 긴밀하게 맺어간다. 이 관계는 이후 백제의 성왕과 신라의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두고 쟁탈전이 있기까지 약 60년간 계속되었다.

이번에 출토된 신라토기와 복암리고분 출토유물은 이러한 고대 백제와 신라의 동맹관계를 우회적으로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더구나 영산강 고대세력이 백제와 다른 고대문화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백제와 신라의 국제관계에 높은 정치·군사적인 위상을 가지고 상당한 영향을 끼쳤던 사람들은 아니었을까? 잠시 단상(斷想)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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