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나주 역사문화

▶ 문바위와 장연서원

  • 입력 2007.10.13 17:07
  • 기자명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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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평 문씨 시조
탄생설화 간직한 문바위

남평 문씨의 시조 문다성(자 명원, 호 삼광)은 신라말(서기 472년, 자비왕 15년) 남평현에서 출생했다. 남평읍 풍림리 원암마을에는 시조 문다성에 관계된 탄생설화가 전해진다.

설화의 내용은 남평 문씨 창간보인 신해보(영조 21년 발간), 남평현읍지(1985년 발간)에 실려있다.

남평현 동쪽 장자지(長者池)라는 못가에 큰 바위가 있었다. 어느날 군주가 그 바위 아래서 놀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바위에 오색구름이 휘감기면서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기이한 생각이 들어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바위 위에 올라가 보니 석함이 놓여 있었다. 함을 열어보니 그 속에는 피부가 옥처럼 맑은 갓난아이가 들어 있었다.

상서롭게 여겨 군주가 아이를 거두어 기르니 불과 5세에 문에 통달하고 지략이 뛰어났다. 또한 총명하여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우치자 문(文)을 성으로 삼고 이름을 다성으로 지어주었다. 후에 대장군을 거쳐 삼중대광벽상공신으로 남평백(南平伯)에 봉해졌다.

후손들은 그를 시조로 하고 관향을 남평으로 했다. 시조의 탄강지인 바위 위에다 1851년 문암(文巖)이라는 비를 세웠다. 못(장자지) 근처에 장연서원을 지어 매년 음력 9월 중정일에 향사하고 있다.

1928년 암각을 지었으나 바위의 경관과 어울리지 않아 허물고 다시 지었다. 현재 2001년경 건립하고 2004년 단청을 마친 문암각엔 내부 문암이 있으며 비석은 바위 아래에 우측면에 있다.

장연서원

서원엔 시조 무성공 문다성, 2세 경정공 문공유, 3세 충숙공 문극겸, 4세 순평군 문유필, 12세 충선공 문익점 등이 배향됐다. 원래 1734(영조 10년)에 건립됐으며 구한말(1871년 고종 8년) 사원철폐령으로 훼철됐다가 1923년부터 있던 자리에 다시 짓기 시작 1975년 중개수를 통해 현재 이르고 있다. 근처의 장자못은 매립돼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서원의 가장 중심인 위패를 모신 사당 상덕사와 충선공 영정당이 있다. 상덕사의 정문인 양춘문 옆엔 오현선조의 유적비가 세워져있다.

주로 고려 시대 인물들의 위폐가 모셔져 있으며 특히 문익점은 여말 원나라에서 우리나라 의복의 혁명을 불러일으킨 목화씨를 가져온 인물이다.

/김진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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