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영섭 소장의 우리문화 나주문화

▶ 복암리 고분에서 출토된 목간(木簡)의 의미

  • 입력 2008.08.31 17:02
  • 기자명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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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5일 아침 복암리 발굴조사 현장의 팀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대형수혈에서 목간이 출토되었습니다’였다. 순간 놀라움과 흥분된 어조로 ‘그래’라고 답하면서 직접 확인하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갔다. 잔존길이 8.4㎝, 너비 4.1㎝크기의 목간에는 먹으로 쓴 글씨가 선명하게 보였다. 대략 16자였다. 나주에서는 아니 호남지역에서도 처음으로 백제시대 목간이 출토되고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목간이란 문자를 기록하기 위해 나무를 일정한 크기로 깎아 만든 목제품을 말한다. 종이 사용이 보편화되기 이전 동아시아에서 널리 쓰인 서사재료(書寫材料)로 오늘날 중국학계에서는 ‘간독(簡牘)’이라 부르고 한국과 일본학계에서는 ‘목간(木簡)’이라 한다. 목간의 생김새는 얇고 긴 네모꼴로 다듬은 나무 쪽(또는 편) 형태이나 두껍다. 삼각형이나 사각형의 막대형태와 널빤지 형태도 있다. 대나무나 소나무 등이 사용되었으나 나라마다 차이가 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책의 한자 표기 ‘冊’자도 대나무로 만든 죽간(竹簡)을 연결한 모습에서 나왔다.

목간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중국 전국시대(B.C.5~3세기)로 보고 있으며 위진시대(A.D.3~4세기)까지 근 1천여년간 사용되었다. 우리나라는 북한의 낙랑지역 등에서 기원전후 시기의 것이 출토되었다는 보고가 있으나 남한에서는 종이가 함께 쓰인 6~7세기 것이 주로 발견되고 있다. 중국과 일본에선 수십만 점이 넘게 확인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현재 500여점 정도다. 백제의 것은 50여 점에 불과하다.

목간에 기록된 내용은「논어」와 같은 전적(典籍)의 기록에서부터 행정문서, 장부, 신분증명, 문서나 물품의 꼬리표, 글자연습용 등 다양하다. 당시 사람들이 직접 쓴 육필(肉筆)일 뿐만 아니라 행정행위와 조세 및 상업 활동 등의 기록이기 때문에 가장 원초적인 사료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중국의 경우 이후 기록된 각종 문헌자료 내용을 보완하는 한편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밝혀내기도 한다.

목간은 문헌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우리나라에선 더없이 귀중한 자료이다. 다양한 성격의 목간이 출토됨으로써 고대사의 비어 있는 부분을 메워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기 때문이다
나주에서 목간출토는 의미있고 몇 가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째, 백제의 도성지역이 아닌 지방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중앙과 지방세력과 관계 특히, 대형 옹관고분을 축조한 영산강 세력과의 관계를 연구할 수 있는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는 것이다.

둘째, 복암리고분의 제철유적 내에서 출토되었다는 점이다. 고대의 제철은 국가의 기간산업이었다. 이곳에서 출토된 2점의 목간을 통해 ‘인력관리’와 관계가 있는 것으로 밝혀졌고 다량의 벼루나 백제시대 기와 등이 함께 확인됨으로써 복암리 지역이 제철공방과 지방행정기관 같은 중요한 시설이 있었다는 추정이 가능하게 되었다.

셋째, 영산강 유역 고대역사를 기록물을 통해 복원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이 지역의 고대역사는 고분 등 유적발굴을 통해 간접적으로 규명되어 왔고 문헌사료에는 관련기록이 거의 없는 한계 때문에 연구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복암리 출토목간은 이 지역 고대사를 복원해 내는 최초의 기록 자료라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복암리 유적에서는 발굴조사가 계속되고 있다. 더 많은 목간 자료가 출토되기를 기대해 본다.

그리고 호남의 역사를 새롭게 쓸 수 있는 많은 기록자료가 나오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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