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중심으로 본 나주근현대사 ④

▶ 청년학생운동은 나주정신으로 꿋꿋하게 이어져

  • 입력 2008.12.09 10:46
  • 기자명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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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96년 11월 2일 청년들이 모여 '지역사회의 개혁과 발전이 곧 사회개혁의 기틀이자 지름길' 이라는 정신으로 나주사랑청년회를 창립하였다. 지역사회의 변화와 개혁을 통해 세상을 바꿔나가기 위해서다. 
 
창립 당시 시민운동은 성장기에 진입하는 시기였고 나주사랑청년회는 소도시 시민운동을 개척해야하는 어려움을 안고 있었다.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해 청년회는 대중조직인 나주사랑시민회로 조직을 개편하고 활동을 하고 있다.
 
안희만 상임대표는 "나주사랑 청년회는 일제하 나주지역에서 항일운동을 펼쳤던 학생청년운동을 펼친 선배들의 얼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 분들의 정신과 위상에 걸맞게 나주를 사랑하고 나주의 자긍심을 지키는데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고 말한다. 이처럼 일제하 나주지역에서의 청년학생들의 항일정신은 오늘을 이어가고 있다. 시민회 사무실 한 가운데 걸려있는 신간회 창립기념 사진처럼.
 
한일학생간의 충돌사건이 발생하여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나주.

나주는 일제강점에 맞서 가장 민족운동과 청년학생운동이 활발했던 곳이다. 거기에 일찍이 신간회의 활동도 왕성해 항일운동의 핵심역할을 했다. 신간회는 1920년대 후반 비타협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결성한 반일통일전선조직이다. 1927년 1월 19일 홍명희·권동진·신석우등 27명이 모여 신간회 창립을 발기했다. 2월 15일 기독교청년회(YMCA)회관에서 신간회 창립대회가 열렸다.

각 지역별 지회창립이 이어졌다. 지역 청년단체들과 민중운동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다. 지방신문기자들도 적극 참여해 24개의 지회가 동아일보ㆍ조선일보ㆍ중외일보 지국에서 결성되었다. 나주지회는 1927년 9월에 창립되었다. 나주지역의 항일운동가들이 모여 나주협동상회운동, 남평유림각 사건, 학생독립만세운동 등에 큰 역할을 하였다.
 
신간회 나주지회 서기장 박공근, 중외일보 지국기자이며 신간회 집행위원인 김형배, 양영택, 박동희 등이 중심역할을 한다.
 
1929년 11월 17일 장날엔 나주보습학교 학생과 나주공립보통학교 5~6학년생 200여명을 동원하여 군청 앞에서 항일시위를 벌였다.
 
'피압박민족 만세' 식민지탄압정책 절대 반대' '언론?출판ㆍ집회ㆍ결사 자유권의 획득' '관료적 교관의 배격' '조선인 본위의 교육제도실시' '치안유지법 철폐' 등의 격문을 살포하고 만세시위에 들어가 시장방면으로 행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잔혹한 진압으로 많은 학생들이 부상을 당했다. 나주지역에서 민족운동세력의 지도를 받아 학생운동이 조직적으로 전개된 것이다. 이 시위운동으로 보습학교 학생 9명과 보통학교 학생 7명이 체포되었다. 이들 가운데 박공근 등 5명은 10개월에서 1년의 징역형을 받았다. 두 학교의 학생 수십 명이 퇴학처분을 당했으며 참여한 학생 대부분은 정학을 당하였다.
 
이어 11월 29일에는 영산포공립학교 학생들이 휴교를 통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전국적으로 항일학생운동
도화선이 된 나주 

3·1운동 이후에 나주지역의 민족운동은 다양한 형태로 이어진다.
청년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 신간회, 학생운동 등이 조직을 갖추고 투쟁에 들어간다. 1920년 나주청년수양회로부터 시작하여 1922년 나주청년회관을 준공하고 나주청년회로 이름을 바꾸어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민족항일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나주의 노동ㆍ농민운동은 경성에서 활동하던 사회운동가 이항발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궁삼면토지회수토쟁, 소작쟁의 지원, 노동자들의 파업지원 등 다양한 항일 투쟁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의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된 것은 신간회의 활동 때문이다. 당시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141개의 지회와 4만여 명의 회원이 활동하는 합법적인 민족운동단체였다. 신간회는 민족협동전선의 실체로서 농민운동이나 노동자운동 및 각종 민족운동에 적극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들이 애국민족운동을 벌이다 대량으로 구속되자 이를 조사하기 위해 허헌, 황상규, 김병로 등 3인을 파견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일제의 식민통치와 민족차별에 반대하여 일어난 3ㆍ1운동 이후 최대의 민족운동이다.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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