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중심으로 본 나주근현대사 ⑤

전남지역 최대 규모 1946년 11월 나주항쟁

  • 입력 2008.12.14 16:36
  • 기자명 마스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46년 10월은 격동의 시기였다. 남한 전역으로 번진 '10월 항쟁' 때문이다. 역사학자들은 '10월 항쟁' 에 대해 엇갈린 해석을 내 놓고 있다.
 
지방적이고 자연발생적인 농민반란으로 해석한 학자와 기존의 지배구조를 유지시키고 변혁적 지향을 거부했던 미군정에 대한 저항이라고 보는 견해다. 역사학자들의 해석이 어떠하든 간에 일제하에서 농민들은 소작쟁의와 적색농민조합운동 그리고 일제 말기의 일상적인 저항 등을 통해 저항운동의 경험을 축적해왔으며 이것이 10월 항쟁의 가장 중요한 동인이 되었다. 1946년의 농민봉기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 이후 가장 대규모적인 저항운동이고 당시의 정치 사회적 개혁 특히 토지개혁이 가장 시급한 과제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10월 봉기의 성격을 자연발생적인 농민반란이었는가, 미군정에 대한 민중의 항쟁이었는가, 토지개혁을 요구하는 농민운동인가 하는 점은 아직 연구과제로 남아있다.
 
나주에서 일어난 11월 봉기 역시 이러한 관점에서 정리되어야 한다.
전남지방의 11월 봉기는 그 규모가 매우 컸으나 경북대구지역처럼 효과는 보지 못했다. 

전남지방 11월 봉기는 목포에서 시작됐다. 10월 31일 새벽 40명의 청년동맹원으로 보이는 군중이 한 경찰초소를 습격하면서 시작된 것이다.
 
보다 본격적인 시위는 이날 아침 목포 시가지에서 시작되었다. 목포전화국의 전화교환수들은 일제히 파업에 들어갔다. 이어 청년동맹원이 이끄는 약 2천명의 학생과 청년들이 목포상고 쪽에서 시 중심가에 있는 경찰서쪽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10월 하순, 미군정은 나주의 인민위원회 세력에 대한 탄압에 나섰다. 미군정의 탄압에 맞서 인민위원회는 '남조선반제동맹'의 이름으로 된 전단을 뿌렸다. 남조선에서 미군정을 철폐하고 행정권을 인민위원회로 양도하라, 강제적인 식량공출을 중지하라, 경찰내부의 친일파와 악질분자들을 쓸어버리자고 주장하는 것이었다.
 
나주의 봉기는 목포봉기가 있었던 10월 31일 밤부터 시작되었다. 오전에는 지서를 습격하고 오후에는 영산포지서와 나주경찰서를 습격했다.
 
당시 상황을 보도한 동아일보에는 이날 아침 7시 30분 약 2백명의 군중이 다시 지서를 습격하여 소총 1정, 탄환 5발, 전화기 등을 강탈해갔으나 약 5시간 뒤 일상이 복구되었다고 보도하였다. 11월 1일 오전 8시 약 700명의 군중이 고막원지서를 습격하여 접전 후 겨우 해산시켰는데, 군중 2명이 사망하였다고 보도하였다.
 
반남면 상황에 대해서는 1일 오전 8시 30분 다수한 군중이 반남지서를 습격하여 소총 3정, 탄환 15발을 탈취하였고, 경관 1명이 남치되고, 2명이 행방불명되었다고 보도하였다.
 
세지면에서 일어난 보도를 보면 1일 오전 10시 30분, 약 1천명의 군중이 습격하여 지서원 전원이 감금되었으나, 응원대의 출동으로 구출되었다고 한다.
 
각 면에서 봉기한 군중들은 오전에 영산포와 나주읍 방면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당시 미군정의 보고서에 따르면 영산포에서 군중 3천여 명이 영산포 경찰서를 습격하자 경찰은 발포하여 군중을 해산시켰으며 이 때 군중 5명이 죽었다고 한다.
 
주한미군사에서는 이날 나주경찰서에 있던 진압병력은 경찰 250명과 국방경비대 80명 그리고 미군 1개 소대 등으로 밝히고 있다.
 
나주경찰서는 11월 5일까지 봉기사건과 관련 133명을 체포하였다. 이 가운데 소년 12명은 11월 4일 석방하였다. 이 날 106명은 군사법정에서 1년간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나머지 15명은 주모자로 4명은 4년 9개월, 1명은 4년 6개월, 1명은 3년, 1명은 2년 6개월 그리고 3명은 각각 2년을 선고받았다.
 
나주의 봉기는 전남에서 가장 규모가 컸고 다른 지역에 비해 조직적이고 체계적이었다. 다른 지역의 봉기가 대개 밤이나 이른 새벽에 소규모 군중이 지서를 습격하는 데 그쳤던 반면 나주봉기는 낮 시간에 대규모의 군중이 동원되었다. 이는 동원능력을 갖춘 조직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나주봉기는 경찰지서를 습격하는 양상을 보이지만 인명 피해는 거의 없었다.
 
나주지역 근현대사를 연구한 한양대 박찬승 교수는 '나주의 봉기가 이처럼 대규모적이고 조직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은 이 봉기를 주도한 이들의 지도력과 조직력이 그만큼 강하였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고 밝히고 있다.
 
인근지역인 화순에서도 대규모 봉기가 일어났다. 화순탄광의 파업은 식량과 임금문제 등을 둘러싼 일종의 노동쟁의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미군정11월 4일과 6일 두 차례에 걸친 습격을 통해 104명을 체포하여 탄광노조 조직을 완전히 파괴하였다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