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강 장봉화의 수필

살기 좋은 우리집 - ①

  • 입력 2010.08.30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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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장 선생님, 아파트로 이사할 계획은 없으십니까?" 늘 듣는 질문이다.

"글쎄,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네. 저 꽃들과 나무를 누구에게 주고 나 혼자 떠난단 말인가? 20년이나 살아온 집이라 정이 들어서 다른 곳으로 가서는 못살 것 같네. 우리가 세워 지은 성당, 20년간 다닌 성당과 교우들을 두고 다른 곳으로는 못 가겠네. 우리 아이들의 추억을 다시 만들 수도 없고…"

고향 집을 떠나서 대학시절 2년을 제외하고 결혼 전후 17년 동안 단칸방에서 살았다. 대략 열다섯 번 정도 이사를 다녔던 것 같다. 광주시에서 8년을 근무했지만 셋방살이는 마찬가지였다. 자녀 셋을 키우면서도 한 방에서 살았고, 같은 이불 속에서 잠을 잤다. 좁다고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불편하지도 않았다. 주인의 비위를 잘 맞추어주기도 하고 집을 갖지 못한 서러움도 없지 않았다.

나보다 더 젊은 부부가 자기 집을 가지고 사는 것을 보면‘저런 사람은 얼마나 능력이 있으면 자기 집을 가지고 살까?’부러워하기도 하였다.

25년 전 동생이 재직하던 회사에서 무주택자들이 주택조합을 만들어 집단으로 집을 지었다. 1984년 내가 땅값과 건축비를 부담하여 동생의 이름으로 집을 지은 후에 세금을 낸 후 샀다. 25.7평짜리 서민주택이었다. 비용은 그동안 저축한 돈과 20년 상환 주택은행 융자금과 농협 적금 담보 대출금으로 충당하였다. 1989년 나주로 전근 오면서부터 나도 우리집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가까운 친구들이 집에 와서 보고는"착하게 살더니 복 받았네.”하고 말들을 하였다.

1993년에는 리모델링을 하였다. 아래층 집을 확장하고 2층을 올렸다. 형님이 고향 논을 판 대금 중 일부를 보조해주셨고, 5년 상환 주택은행 융자금에 2층의 전세금을 받아서 주기로 하고 업자에게 맡겨지었다. 공사 기간 두 달 동안 우리 가족 다섯 사람은 21평짜리 동생의 아파트에서 그의 가족 네 명과 함께 살았다.

새로 꾸민 우리집은 건평이 아래 층 30평에 2층 23평으로 합계 53평이나 된다. 우리 가족은 아래층만 사용하고 2층은 세를 내줬다. 본격적으로 집들이를 하였다. 친지며 동료들을 하루에 한 단체씩 초대하였다. 15개 단체 이상을 초대하였으니 한 달은 걸린 것 같다. 집사람은 몸살을 앓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참으로 행복한 시절이었다.

융자금을 완전히 갚은 것은 10년이 못된다. 집을 마련하느라고 청춘을 다 바친 것이다. 그런데 우리집의 값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가격이 같다. 서울의 집값이 미친 듯 요동을 치고 광주의 아파트 값이 크게 치솟아도 그때나 지금이나 값이 그대로이다. 나를 닮은 것 같다. '20년 전, 아니 10년 전에만 서울에 집을 샀더라면 우리 아들이 나처럼 셋방살이를 하지 않을 터인데….'생각하면서 혼자 웃는다.

우리집 뜰에 포도나무와 감나무를 한 그루씩 심었다. 20여 년 전 농업을 전공한 한 후배가 묘목을 선물로 가져다주어 기른 것이다. 여름에는 청포도를, 가을에는 빨간 감을 수확한다.

형제들과 우리 가족이 나누어 먹을 수 있는 충분한 양을 수확할 수 있다. 진짜로 믿을 수 있는 무공해 친환경 과일이다. 여름철이면 지나가는 이웃 사람들이 포도나무를 보고 부러워한다. 포도나무는 시원한 그늘도 만들어 주고 파란 잎이 눈을 건강하게 해 준다.

처마 밑에는 100여 개의 화분에 꽃과 나무를 가꾼다. 꽃이 필 때에는 그 꽃망울을 보기 위하여 아침에도, 저녁에도 보고 또 본다. 출근할 때도 보고 퇴근할 때도 본다. 동양란과 봉숭아를 비롯하여 백일홍, 부겐베리아, 선인장, 베코니아, 닢펜시아, 국화, 철쭉, 꽃기린 들이 번갈아 꽃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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