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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 획나주지역 현대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②
광주학생독립운동 도화선이 된 나주역 앞 '사라예보 총성'
글 싣는 순서
■ 항일운동의 조직적 기반과
역량 갖춘 나주학생들
김준 기자  |  najuk2010@najunew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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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1.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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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준채는 후쿠다의 겉저고리를

힘차게 잡아당기면서 외쳤다.

"나쁜 자식"

"뭣이 어째"

후쿠다가 대꾸하며 달려들었다.

"이 야만인 새끼야, 남녀구별도 못 해!"

박준채는 올해 고보 2학년생으로

아직 어렸지만 야무지게 쏘아댔다.

후쿠다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요자식! 센징노 쿠세니!"

그 말은 '조선놈 주제에'라는 뜻이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은 꾸준히 계속 되어온

광주학생 항일 투쟁의 연속이었지만

직접적인 계기는 바로 이 한마디에 있었다.

'센징노 쿠세니'가

'사라예보의 총성'이 된 것이다.



덥다. 아니 짜증이 날 정도로 무덥다. 기상청에서는 폭염경보를 발령했다. 그만 돌아다니고 더위를 조심하라는 뜻 일게다. 그러나 발걸음은 옛 나주역사를 향하고 있었다. 나주학생독립운동 기념관을 찾아서다.

역사 속에서 나주의 정체성을 찾고자하는 기획 의도는 좋지만 아직도 막막하고 답답한 마음은 여전했다.

1929년 11월 3일은 이 땅의 젊은 학생들이 일제의 식민 통치를 물리치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궐기했던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일인 '학생의 날'이다. 그 진원지가 나주이고 운동의 주역이 나주의 젊은 학생들이었다.

나주에서 발생하여 마침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던 광주학생독립운동.

항일투쟁의 규모나 국내외에 미친 영향 그리고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차지하는 의의로 보아 3ㆍ1운동과 쌍벽을 이루는 거국적 민족독립운동이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일본은 국내적으로는 경제공황과 노동농민운동의 고조로 위기에 처하고 한반도에서는 3ㆍ1운동을 통해 한국민의 거족적인 저항에 부딪힌다. 일제는 이에 폭압적인 무단통치 대신 유화적인 문화통치를 시행한다. 일정정도 한국인의 관리임용과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허용하고 한국인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한다는 제스처를 보냈다. 그러나 이는 말뿐이고 허울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1925년부터 적용하기 시작한 '치안 유지법'은 모든 독립운동가를 탄압하는데 적용되었고 1928년부터는 그 법정형이 10년 이하의 징역부터 사형과 무기징역도 가능하도록 개정하여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투옥되거나 처형당했다. 이때 민족지인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한글신문이 간행되고 개벽 등 한글잡지가 한국인에 간행되어 항일의식을 고조시키는데 앞장서게 됐다. 수많은 학생들이 애독을 하면서 독립사상을 확고하게 정립하고 토론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나주에서는 1927년 9월 신간회 나주지회가 창립되었다. 이 신간회가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대해 나갈 수 있는 조직적 기반을 제공한 것이다.

12월에는 나주청년동맹이 결성되어 나주지역에서 학생운동을 조직적으로 이끌어낸다. 시위가 처음 시작되었던 광주에서는 1927년 10월 신간회 광주지회가 설립되었으며 같은 해 11월 광주 청년동맹이 결성되었다. 신간회는 나주가 청년동맹은 광주가 한 달씩 빠르게 설립되었지만 당시 나주는 전남지역 항일운동의 정신적 지주이자 가장 강력한 조직과 철저한 사상무장으로 강력한 지도력을 갖추고 있었다.

광주학생독립운동 당시 주도적 역할을 했던 박준삼과 박공근은 신간회 나주지회 간부이면서 나주 청년동맹의 간부로 활동하였다. 신간회, 청년동맹, 근우회 등이 연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옛 나주역사에 도착했다. 열차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당시 학생들의 함성은 귀전을 때린다. 그들의 장엄하고 결의 찬 목소리는 나주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갖도록 하는데 충분하고도 남았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사건이 발생한다.

나주역 사건이 바로 '사라예보의 총성'이다. 나주역에서 나주-광주 간 기차로 통학하던 광주중학교 후쿠다 등 일본인 학생들이 조선인 통학생 광주여고보생 박기옥 이광춘 등 여학생을 희롱하자 광주고보 2년생인 박준채가 격분하여 후쿠다를 꾸짖으면서 한일 학생간 충돌로 이어져 10월 31일 통학열차안 사건이 발생한다. 이어 11월 1일 광주역 사건에 이어 11월 3일 광주고보생 1차 시위, 11월 12일 2차 시위 그리고 다음해 1월 8일 광주고보와 광주여고보의 백지동맹(시험거부) 등에 나주지역 학생들은 모두 앞장서서 시위를 주도해 나갔다.

신간회 나주지회와 나주청년동맹에서 항일운동을 주도하던 박공근은 11월 27일 농업보습학교 학생들과 나주공립보통학교 5∼6학년 학생 250여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를 성공시킴으로써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로부터 이틀 후인 1929년 11월 29일에는 영산포 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일으켰고 이듬해1930년 2월 10일 정오에 나주농업보습학교 학생들과 보통학교 학생들이 또다시 시위를 전개했다.

서울에서 신간회와 청년동맹의 간부로 활동하던 나주출신 항일독립운동가 이항발은 서울에서 시위를 조직하는 한편 12월 2일과 3일에 걸쳐 경성제국대학과 서울시내 각 중등학교에 유인물을 배포하던 중 구속됐다. 이항발은 광주에서 올라간 장석천ㆍ강석원ㆍ국채진, 조선청년총동맹의 차재정ㆍ황대용ㆍ곽이형, 중앙청년동맹 교육부장 곽양훈(곽현) 등과 함께 유인물을 작성하고 배포했다. 당시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호외를 통해 이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다.

11월 3일의 1차 시위에서도 나주학생들은 주도적으로 참여했는데 김보섭ㆍ김종섭ㆍ이계춘ㆍ오쾌일ㆍ이영범 등 독서회 회원들이 앞장섰다. 특히 김보섭은 광주지역 중등학교 독서회의 지도부인 독서회 중앙부에 광주고보 대표로 참여하여 조사선전부를 맡아 주도적인 활동을 하고 있었다.

11월 12일 2차 시위가 독서회를 중심으로 준비되는 과정에서도 나주통학생들이 앞장섰다. 1차 시위 이후 검거를 피했던 오쾌일과 이영범은 독서회의 지도자 장재성과 함께 시위를 준비했다. 오쾌일은 4종의 유인물을 직접 제작하고 배포했으며 2차 시위의 책임을 자신이 지기위해 유인물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었는데 시위 직후 동경으로 피신했다가 검거되었다.

1930년 1월 개학하자마자 광주고보와 광주여고보 학생들은 백지동맹을 일으켰는데 광주고보의 주도자 가운데 나주통학생들은 손동출과 정세면이었고 광주여고보의 주도자 중 나주학생들은 나주역사건의 주인공이었던 이금자와 이광춘이었다.

나주인들은 한마디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의 발생과 확대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는 임진란 의병운동으로부터 동학농민전쟁ㆍ구한말 의병운동으로 이어져온 항일운동의 전통과 일제 식민지 경제침략의 내륙 전진기지였던 나주지역의 사회경제적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며 나주청년회와 신간회 나주지회 같은 항일운동 역량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나주학생독립기념관의 김은선 학예사는 "민족정기의 확립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히 요구되는 이 때에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쟁취하고자 의연하게 나섰던 나주학생독립운동가들의 정신을 후세에 길이 일깨워주는 사업은 영속적으로 추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기획취재반

김진혁 기자

이현영 기자

이 기획취재는 지역신문발전위회의 지원으로 이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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