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접경지역

통일선교 탐방기(3)-1

고구려의 옛 땅 지안(集安)에 가다

  • 입력 2011.12.19 21:18
  • 기자명 김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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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접경지역 탐방단 일행은 여행 첫날을 단동시 단철호텔에서 묵었다.

한국으로 치면 모텔급 정도인데 중국에서는 삼성급이다. 북한동포들의 식량난으로 인한 고통에 비하면 송구할 만큼 좋은 숙소였다. 중국여행 이틀째를 맞는다. 오늘의 일정은 이러하다. 압록강 수풍댐을 유람선으로 관광한 후 3시간쯤 관광버스를 타고 즙안(국내성)으로 이동한다. 즙안에서는 고구려의 웅장한 기상이 숨쉬는 광개토왕비와 대왕릉, 장수왕릉, 국내성 성벽을 멀리서 환도산성을 조망한다는 일정인 것이다.

예장총회 북한접경방문단 일행은 단장인 김석주 목사, 총무 이시걸 장로를 비롯해 29명이었다. 이번 여행은 매주 화요일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부설 통일선교대학원 과정을 이수한 1기생 동문들이다. 총회 내 각 노회에서 부름받은 조국의 평화통일과 북한선교에 사명감이 넘치는 목사ㆍ장로들의 첫 나들이인 셈이다.

압록강은 한반도에서 가장 긴 강으로 장장 790km이다. 백두산 천지에서 발원하여 서쪽으로 장장 790km를 굽이쳐 흘러 신의주 하구에 이른다. 압록강 푸른 물은 한강보다는 수질이 조금 나아 보였다. 일행은 유람선을 빌어 타고 수풍댐 관광에 나섰다. 수풍댐은 일제에 의해서 건설되었다고 90년 초 일본내 '고난의 현장' 방문시에 들은 바 있다. 일본의 나고야 인근의 구구리 지방 가네야마 수력발전소를 건설한 기술진이 공사를 맡았다는 것이다. 이 댐공사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의 희생자가 가장 많이 나왔다고 들었다. 설계와 감독은 일제가 주도하고 현장 노역은 우리 동포들이 강제 동원되었을 것이다. 수풍발전소는 해방전후해서 조선에서 가장 큰 발전량을 보유한 수력발전소였다. 해방 후 6ㆍ25 전쟁 직전까지 북한에서 전기를 송출해서 보내주었으니 사실 그 당시 삼엄했던 38선을 넘어서 형제끼리 유무상통(有無相通)의 정신을 실천했던 것이다.

중국관광버스는 북한접경을 따라 지린성 지안현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필자는 중국 농촌의 모습이 궁금하였다. 베이징이나 상하이와 같은 대도시의 발전상은 벌써 국제적 수준을 능가하고 있다. G2 국가란 말이 중국을 추겨 세우는 말이 아니다. 미국에 요구할 수 있는 채권이 2조 달러에 달하고 있다. 중국은 경제대국에서 최근 항공모함의 진수, 핵능력 개발 등으로 군사대국으로 까지 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아직 도시와 농촌간 빈부의 격차는 심하고, 농촌에 젊은이 기근현상은 한국과 마찬가지였다. 인구는 대도시로 몰려들고 있는 실정이다. 랴오닝성(요녕성)과 지린성(길림성)의 농촌가옥은 사회주의 나라답게 일률적이었다. 다소 크기의 차이는 있었으나 붉은 기와지붕에 삼간 일자형 농가가 대부분이었다. 드문드문 농촌의 소도시 상가마다 붉은색 복복(福)자 부적같은 종이가 붙여져 있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복을 다 가져다 줄 수 없다는, 원초적 종교심의 발로일까 .....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주몽이 건국하였다. 고구려는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 유역, 산악지대인 졸본(환인) 지방에 자리를 잡았다. 고구려는 차츰 주변의 소국들을 점령하여 압록강가의 국내성(통구)으로 옮겨 5부족 연맹체제로 발전한다. 광개토대왕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정복군주로 평가받고 있다. 일행은 광개토대왕비각을 방문하였다. 유리전각에 들어있는 비석은 과연 웅장하였다. 서두에는 고구려 건국자인 주몽의 출생담과 건국담이 기록되었다. 본론에서는 광개토대왕 제위시의 주요 영토확장사업을 연도별로 정리하여 고구려 당대의 영광을 과시하였다. 오랫동안 사학계의 문제가 된 부분은 본론 중 신묘년 기사이다. '백잔(백제)ㆍ신라는 오래 전부터 속민으로 조공을 바쳐왔다'는 내용 뒤에 '왜이신묘년래도해/파백잔 나위이신민'(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 羅以爲臣民)이라는 구절에 대한 해석학이 문제의 핵심인 것이다. 문장 전체의 주어를 '왜'로 볼 경우, 일본 서기에 근거해 일본 국수주의자들이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設) 주장이 먹혀들 것이다. 이것은 일본이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두어 한반도 남부를 식민지로 경영했다는 학설이다. 즉 일본의 조선을 침략하고 그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날조한 식민사관의 하나인 타율사관 중 대표적인 것이다. 필자는 고구려를 주어로 하는 해석이 옳다고 본다. '왜가 신묘년(391년)에 바다를 건너오니 (고구려가) 백제를 격파하고 .....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아무튼 '임나일본부설'이나 '독도를 다께시마라 부르면서 일본 땅'이라고 우겨대는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철저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동명왕릉의 규모도 대단하였다. 모양이나 건축방식은 고대 중동지역의 지구라트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광개토대왕비와 왕릉, 동명왕릉을 비롯한 오녀산성, 환도산성, 국내성 등은 이미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고 한다. 국내성은 원래 네모꼴의 평지성으로 전체 둘레가 2686m에 이른다. 국내성 성벽들은 일제 때까지만 해도 상당한 높이로 남아 있었고 모서리의 망루도 보존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벽 일부와 망루는 중국의 도시개발로 인해 이미 헐려서 아파트가 들어선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계속>여기에서 고구려를 잃은 분단된 민족의 아픔을 실감하였다. 일찍이 단제 신채호 선생은 일제 침략에 맞서 민족혼을 일깨우고 자주독립국가의 의지를 북돋우기 위해 우리 역사를 연구하였다. 단재선생의 대표적인 노작 '조선상고사'는 뤼순감옥에 갇혀서 옥중에서 기록한 고구려ㆍ발해의 역사서인 것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한국의 고대사, 고구려사와 발해사를 폄하하여, 중국의 영향권에 끌어들임으로 중국내부를 결속하고 조작된 역사관 위에 중화주의를 세우려는 비상식적 발상이다. 고구려사를 비롯한 우리 민족의 고대사에 대한 자긍심은 오늘날 민족의 평화통일의 에너지로 활용되야 한다. 우리는 자주국가로서 미국에 전시작전권을 맡겨놓고 있는 모습에서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남북대결의 시대를 청산하고 다시 6.ㆍ15와 10ㆍ4 선언을 실천홰야 한다. 자주ㆍ평화ㆍ민족대단결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평화통일에는 단계가 있다. 먼저 공존하고, 교류하고, 평화협정으로, 평화통일로 나아가는 로드맵을 열심히 밟아가야 할 것이다.(계속)



김병균 목사















































대련공항에 도착하자 일행은 대련시를 지나 여순감옥으로 향하였다. 대련(다렌)시와 여순(뤼순)은 자동차로 40분쯤가는 지근거리였다. 대련은 역사적으로 랴오둥 반도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하얼빈으로 연결되는 남만주 철도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자, 1895년 4월 전후처리를 위한 시모노세키조약(下關條約)에서 청은 일본에게 대만, 요동, 팽호도를 할양하였다. 이후 러시아는 독일 ? 프랑스와 제휴하여 일본에 대해 동양평화에 해롭다는 구실로 요동 반도를 청에 반환할 것을 요구한다. 이 사건이 이른바 삼국간섭이다. 1895년 러시아는 청으로부터 관동주(대련, 뤼순 등)를 조차하였다. 대련은 1897년 러시아가 항구를 개발하기 시작하면서 발달한 도시였다. 러시아가 동청철도의 종착역을 마련해 ‘다리니‘(멀다)라고 명명했다. 뤼순은 중국 랴오둥 반도[遼東半島]의 남쪽 끝에 있는 해군 군항도시이다. 1년 내내 얼음이 얼지 않고 수심이 깊어 항구로서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에 의해, 동년 5월 말에는 일본군이 무혈 입성하여, 전후 1905년 포츠머스 조약을 맺어 일본에 조차권을 양도했다.

1909년 10월 26일 9시 30분 하얼빈 역에서 한국 의병 참모중장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의거는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는 20세기 초의 제국주의 열강의 확장에 대한 일대 타격과 질타로서 피압박 민족과 세계민중들을 크게 고무하였던 것이다. 필자는 안중근 의사가 갇혀 있었던 여순감옥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 악랄한 일제의 모진 탄압과 옥중고초는 오죽했으랴! 이번 여행이 필자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적절한 기회였다.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부 수양산 아래의 광석동에서 출생하였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벼슬을 하였던 부유한 가정이었다. 그는 고려말기 유명한 유학자 안향(安珦, 1243-1306)의 26대 손이다. 안중근의 모친 조씨는 3남 1녀를 출산했다. 안중근이 장남이고 정근(定根)과 공근(恭根)이 있었다. 안중근이 출생할 때, 가슴에 검은 점 일곱 개가 있었다. 그 모양이 북두칠성을 닮았다하여 응칠(應七)이라 지었다. 안중근의 동년(童年)시기는 조선이씨왕조가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와 같이 뒤흔들리는 내우외환(內憂外患)이 겹쳤던 동란의 시기였다. 안중근은 을사늑약후 1906년 삼흥학교를 건립 인재양성에 주력하였다.

안중근이 갇혀있던 때는 일제가 여순을 차지하고 있을 때였다. 여순감옥은 원래 러시아인이 세운 병원건물이었다. 병원을 개조해서 만든 감옥이었기에 감옥 내부에 러시아 건축양식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붉은 담장에 둘러싸인 감옥은 건물이 여러 동이 있었다. 안의사의 방은 일반수인들과는 달리 간수부장실의 바로 옆에 있었다, 3-4평 쯤 되어 보이는 길쭉한 방이었다. 여기에는 책상과 의자도 놓여 있었어서, 집필과 서예를 하는데 그다지 비좁은 공간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였다.



국제지사 전시관(The international soldiers in Luhsun' 입구에는 전 중국 수상 주은래(周恩來)의 안중근 의사에 대한 평가가 담긴 액자가 걸려 있었다. ‘중일, 갑오전쟁 후 일본제국주의 침략에 항거하는 중국 ? 조선인의 투쟁은 본세기 초 안중근이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새겨져 있었다.

안의사 기념실에는 그의 독립운동 공적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1907년 연해주로 망명 의병운동에 참가, 대한의군참모중장(大韓義軍參謀中將), 독립특파대장, 의령지구 사령관으로 일군(日軍)과 격전하였다. 1909년 동지 11명과 동의단지회(同義斷指會)를 결성, 1909년 10월 29일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사살하고 체포되어 1909년 11월 3일 여순감옥(旅順監獄)에 수감되었다. 1910년 2월 14일 일본관동지방법원에서 6차레의 재판을 거듭한 끝에 사형이 언도되었다. 1910년 3월 26일 31세의 꽃다운 나이에 일본감옥에서 사형집행으로 순국하였다. 옥중저서로는 ’동양평화론’이 있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공로장이 수여되었다” 국제지사전시관에는 일제강점시대의 애국독립지사였던 신채호 선생, 이회영 선생의 기념자료도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안의사의 고향과 가족사진, 1909년 의거당시의 하얼빈 역사 사진이 걸려 있었다.

안중근 의사가 당시에 사용했던 권총, 안중근 의사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된 우덕순, 유동하, 조도선 지사의 사진, 관동지방법원에서 재판받던 안중근 의사의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또한 1910년 2월 14일 관동도독지방법원의 안중근 의사 사형언도 기록, 사형집행 직전에 동생과 홍신부와의 면회사진이 걸려 있었다. 또한 감탄하는 바는 그의 옥중에서의 서예활동이었다. 구구절절이 애국과 독립의 투혼이 서려있는 명필, 명문장이었다.

오늘날 우리 민족과 동북아 3국이 꼭 기억해야 될 바는 안의사의 동양평화론이다. 서문에서 이렇게 밝힌다. “ 그는 제국주의 각축이 낳는 문제를 정확히 진단했다, ‘.... 젊은 청년들을 훈련시켜 전쟁터에 몰아넣어 수없이 귀중한 생령들이 희생물처럼 버려져, 피가 내가 되어 흐르고 주검은 산을 이룬다’ 그는 서세동점(西勢東漸)의 환란의 시기엔 ‘동양사람이 일치단결해서 방어함이 최상책’임에도 일본은 이러한 대세를 못보고 오히려 중국과 한국에 대한 제국주의적 침략을 도모하니 ‘동양평화를 위해 의로운 전쟁을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다’며 이토를 사살한 이유를 당당히 밝혔던 것이다." 그의 동양평화론은 1세기 후 오늘의 현실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자본주의의 각축은 더욱 심해졌다. 60년 이상 분단된 민족의 갈등은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한반도 평화통일운동은 동북아 평화와 직결된 문제임을 알아야 한다.

대한민국 어디에도 이렇게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고, 그의 애국독립정신과 투쟁사를 선양하는 기념관이 있을지 모르겠다. 중국 관광이라면 어느 곳보다 여순감옥 국제지사실 안중근 기념실을 찾아야 민족의 자주?평화?민족대단결의 정신과 동북아 평화에 대한 염원이 솟구쳐 오를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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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균 목사

(예장전남노회 남북한선교통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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