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산포 도내기샘의 여걸 나합(羅閤)

세도정치에서 가장 권세 부린 여인

  • 입력 2013.07.06 18:43
  • 기자명 김종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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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천서원에서 영산포쪽으로 가는 옛길을 따라 가면 전남면허시험장이 나오고 그 삼거리 길가에 나합의 도내기샘이 있다.

대원군이 나주를 평하여 결불여나주(結不如羅州)라고 했다고 한다. 경지 면적 넓기는 나주만한 곳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속내를 들여다보면 경지가 넓으니 수확량도 많았을 것. 따라서 관아에서 거둬 들이는 세금도 많았을 거고, 비리나 수탈도 함께 성행했을 거라는 것이다.

아리따운 기생들이 득실대는 평양감사를 선호하듯 세금을 거둬 치부하기 좋은 곳인 나주 목사도 벼슬아치들이 좋아하는 자리였을 것으로 보인다. 땅이 넓고 기름지어 산물이 풍족한 만큼 비리나 부정을 저지르는 탐관오리가 많았다는 얘기다. 이런 가운데 나합샘에 대한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 본다.

나합은 구한말 세도가였던 김좌근의 애첩으로 세도정치에서 가장 권세를 부린 여인으로 많은 야화를 남겼다. 나합은 영산포 삼영동에서 태어났는데 성씨는 양씨라 하는데 확실치 않다.

이 당시 한학의 대가로 불리던 이서구가 전주감사로 있었는데 나주에 인물이 태어날 것을 점치고 사람을 불러 “지금 삼영리로 내려가면 어린아이를 낳은 이가 있을 것이니 그 아이를 찾아서 남아면 즉시 죽이고 여아면 살려 주어라”고 명령했다.

사람이 급히 영산포에 이르니 과연 산고가 든 집이 있어 찾아가 확인하니 여아였다. 이를 보고 받은 이 감사는 “그년 세상을 꽤나 시끄럽게 하겠다”고 말했다 한다. 나합은 자라면서 자태가 곱고 소리를 잘하고 기악에도 뛰어났다. 그녀의 집은 현 내영산마을 건너 어장촌 근처에 있었기에 그 곳에 있던 도내기샘을 이용했는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애태우는 총각이 많았다 한다.

그래서 “나주 영산 도내기샘에 상추 씻는 저 큰애기, 속잎일랑 네가 먹고 겉잎일랑 활활 씻어 나를 주소”라는 민요가 나돌 정도였다고 한다. 후에 나합이 김좌근의 애첩이 되면서 도내기샘은 나합샘으로 불렸다.

나합은 기생출신이었다고 한다. 나합은 이름이 아니라 별명이다. 옛날 합하(閤下)라고 해서, 정1품의 고관들에게만 붙여 주는 칭호가 있었다. 각하 비슷한 뜻으로 나주 출신기생이 워낙 세도가 당당해 그 ‘합’자를 붙여서 합부인이라고 부르게 되었고 고향이 나주라서 나주 합부인, 줄여서 나합이다.  

 

 

관찰사나 수령들에게는 반드시 합부인이 있어 뇌물을 챙겼다. 요즘 장관 부인이 직접 돈을 챙기다가 발각된 사례가 있는데, 옛날에는 첩을 시켜 돈을 먹었다. 한번 암행어사가 오는 날에는 일망타진, 첩들이 감옥을 가득 메우기도 했는데, 곧 석방되었다는 것이다.

자기 첩이 너무 설친다는 소문을 들은 김좌근이 “사람들이 너를 나합이라고 부른다며?”하고 언짢은 듯 웃자, “합(閤)이 아니라 합(蛤, 조개. 아들을 낳으면 고추고 딸을 낳으면 조개 즉, 여자를 뜻한다)자를 붙여서 그렇게 부르는 겁니다”라고 변명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설망어검(舌芒於劍)이라 칼보다 사람에 세치 혓바닥에 나라가 움직이니, 나합의 버선코에 충성을 맹세하였던 그 시절도 대원군에 의해 처참하게 무너졌다고. 

 


나합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도 내려오지만 전국에 흉년이 들었을 때 나합이 김좌근을 졸라 나주에 구휼미를 풀어 나주 사람들을 도왔다 한다. 그런 탓인지 나주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김좌근을 기리는 비가 나주 관아 터 안에 남아 있다. 영의정김공좌근영세불망비(領議政金公左根永世不忘碑)다. 안동김씨의 세도가 끝나고 그 비는 두 동강이 난 채로 쓰러져 있던 것을 금성관 경내에 다시 바로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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